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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以信稱義)와 성화
조규현  2016-11-08 07:09:13, 조회 : 127

이신칭의(以信稱義)와 성화

구원에 관하여 유대교의 입장은 율법의 행함에 있었다. 그러나 율법의 행함은 곧 죄의 본질인 ‘자기 주장(self-assertion)’으로 정의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 주어질 수 있다고 바울은 주장한다.  바로 여기에서 유대주의와 바울의 충돌이 있게 되었다.  
칭의(稱義)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의롭다고 인정하다. 간주하다’라는 뜻으로 법정적 칭의의 의미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의롭게 되다’라는 연합의 의미로서 칭의이다.  후자의 경우 ‘새로운 피조물(고후5:17)’로 신자를 부활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도록(롬6:4)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라 할 수 있다.”


1. 칭의(稱義)의 의미

1) 법정적 칭의

루터, 리델보스, 그랜필드 등의 주장으로 ‘의롭다고 인정하다, 간주하다(a status given by God)’의 의미로서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인 우리에게 전가(轉嫁)됨을 뜻한다.

(롬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2) 창조적인 구원 행위 - 의롭게 되다.

로마서 주석의 세계적인 대가인 케제만의 주장이다. “히브리 성경에서 ‘의,  정의,  칭의’의 용법은 단지 ‘상태’나 ‘존재’의 언어가 아니라 ‘행동 지향적’이다.  사실상 인간의 의를 가능하게 하고 성취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이다.”  따라서 의롭게 되다(the saving action of God)의 의미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능력과 행위라 본다.  즉 전 우주적 전환과 회복을 포함한다.  “이는 인간을 자유케 하는 은혜의 부름과 권고가 실현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3) 칼빈의 입장

루터 신학의 심장인 이신칭의(以信稱義)는 실존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였으나 종교개혁과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이 되었다.  칼빈도 칭의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율법의 행위가 칭의가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는 믿음은 순종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믿음과 선행은 같이 붙어 다닌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칭의와 성화의 주체가 동일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칭의의 주체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칭의를 시작하신 그리스도가 결과적으로 성화도 시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칭의(稱義)와 성화는 다르다고 보고 있다.  즉 칭의는 신분의 변화이고 성화는 인간 본성의 변화라고 하였다.  “이것은 후대의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전통적인 구분법이 되었다”


2.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성화의 근거

바울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는 모두 성령의 사역이며(고전6:11), 칭의에서 성화를 찾는다. “바울의 근본적인 관심은 단지 죄인들로 하여금 개별적인 죄를 더 이상 짓지 말라고 권면하거나 지은 죄들을 회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으라고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죄성을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는가 하는데 있었다(롬6:4, 엡4:22-24)”
첫 아담에 속한 자아가 죽음으로서(롬5:17) 두 번째 아담 되신 그리스도에 속한 자만이 죄에서 해방된 자(롬6:7)로,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고후5:17)로서 부활의 새 생명(롬6:4)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3. 칭의와 믿음과 선행과의 관계

칼빈은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이라 하였다.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고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지면 반드시 믿음의 행위가 나온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지만 ‘믿음의 순종’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능동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믿음’이 칭의를 가능하게 하며 선행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갈2:16, 갈2:20)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롬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갈5: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4. 결론

“믿음과 선행은 같이 붙어 다닌다” 혹은 “칭의는 신분의 변화이고 성화는 인간 본성의 변화”라고 말한 칼빈의 이 말에 대하여 혹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육을 입고 있는 인간 본성이란 죄성 뿐인데 그 죄성이 어떻게 성화를 통하여 변화될 수 있는가 하는 반문이다.

필자도 인간 본성의 변화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동의를 한다.  그러나 이런 비유로 반문하고자 한다.  인간은 육적 생존을 위하여 밥을 먹는다.  먹어도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죽는다.  때문에 밥 먹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같은 논리로,  성화로써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으니 성도로서 성화의 삶은 불필요하단 말인가?

구원은 믿음과 행함으로 된다는 주장에서 성화의 삶을 강조한다든지,  이 땅에서 반대급부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선행을 해야 한다든지,  혹은 성도의 모습을 타인에게 모범적으로 보이기 위해 윤리적 실천을 해야 한다 등으로 가르친다면 이는 배격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칭의와 성화의 주체가 동일한 그리스도이며 칭의를 시작하신 그리스도가 결과적으로 성화도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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