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설교>
재림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아직 멀었다’입니다. 하늘로 가시면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시고 2천년 넘는 세월이 흘렸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재림이라는 것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세상의 삶을 편안하게 누려보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좀 더 고상한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림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재림이 없다면 세상에 끝도 없을 것이고, 심판도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단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용도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가 말하는 구원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사건은 단순히 손오공처럼 구름타고 하늘에서 오신다는 신화적 의미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재림은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또한 심판은 참된 진리와 영원한 생명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진리와 생명이 아닌 것들은 당연히 제거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와 생명으로 가장하고 사람들을 미혹했던 악한 세력이 심판을 받고 참된 진리와 생명을 조롱했던 모든 거짓된 것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기어이 완성하시겠다는 의지와 신실함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이같은 약속 안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견고히 붙잡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악한 세력이 무엇으로 우리를 흔들고 시험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붙드는 그것이 곧 인내고 믿음입니다.
10절에 보면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의 이같은 말에 얼마큼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생각하는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얘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의 강림이라는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방식으로 살아왔던 삶에 완전히 고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만족은 주의 강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는 삶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면 바로 그것이 멸망으로 달려가는 어리석은 생각임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에서 구원 받을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이 하나님이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세상을 심판하시고, 참된 진리와 생명을 온전히 드러내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이런 가르침을 여러분이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에 대한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강림 즉 재림이 신앙의 중심이라면 세상에 대한 시각이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세상에서의 삶에 집착하여 세상의 것이 있고 없는 것으로 울고 웃으며 산다면 예수님의 강림은 마음에 두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은 모두 해체되어 사라집니다. 밥 먹고 돈벌며 즐기고 누렸던 모든 일상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우리가 살아온 일상 또한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을 포기한 채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살 사람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재림과 함께 일상이 끝난다는 것은 일상 속에서 신자가 투철해야 하는 것은 ‘주가 다시 오신다’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신앙에 투철한 자로 산다면 그는 세상 속에서 높임 받고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높임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허상일 뿐이고 헛된 명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신자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그냥 있는 것으로 감사하며 살기를 힘쓸 뿐입니다.
이처럼 주의 강림을 믿는 사도가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교회를 위한 기도라고 하면 거의 부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부흥하게 해달라고 하고, 교회에 사랑이 넘치게 해달라고 하고, 빈자리를 채워 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이유가 오직 교회의 잘됨과 연결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11-12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강림을 믿고 기다리는 사도의 교회를 향한 관심은 부흥이 아닙니다. 주가 강림하셨을 때 교회 부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교회가 부흥된 것을 기준으로 해서 각기 다르게 대우하신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교인 수가 늘어가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의 존재 목적이, 그리고 교회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부흥에 있다면 그것은 이미 십자가를 벗어나고, 주의 강림을 밀쳐버린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교회를 위해 기도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의 이름이 그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고 그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받는 자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교회가 이렇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주가 강림하셨을 때 교회가 누리는 참된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교인 수나 교회 건물의 크기는 전혀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이름을 내기 위해서는 교인 수와 건물의 크기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도 그와 같은 기준으로 교회를 바라보신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림하셨을 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광을 누리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복음을 조금이라도 아는 신자라면 다 인정할 것입니다. 바로 그 앎이 현재의 삶에서 그대로 묻어 나오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신앙생활은 주의 강림을 믿고 바라봄으로써 가능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돈으로 평가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돈이 없으면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돈 없는 팔자를 한탄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힘과 무기로 여기면서 약자를 다스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과연 무엇이 여러분을 한탄하게 합니까? 세상과 똑같이 돈 없는 것 때문에 한탄합니까? 그것은 주의 강림을 생각하지 않는 결과입니다.
주의 강림을 덮어 버리면 보이는 것은 세상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영광이 찬란하게 다가올 뿐입니다. 여러분의 자존심을 세우고 남들에게 자기를 과시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사탄은 이처럼 인간이 원하고 구하는 세상의 것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유혹을 이기는 것은 참된 영광은 세상의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가 강림하실 때 주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누리게 됨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진심으로 주가 강림하시고 주가 이루실 영광의 세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신다면 믿음을 구하십시오. 믿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을 바르게 보게 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도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