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 8:32)
성경은 사탄, 마귀, 귀신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 말한다. 사탄이 언약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를 반대하고 훼방하는 악한 세력이라는 점에서 사탄의 활동을 아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탄의 활동을 알지 못하면 사탄에게 장악되어 예수님의 일을 훼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믿음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사탄이 인간의 믿음으로 예수님의 일을 훼방한다는 것이다.
‘사탄’은 대적, 대적자, 고소자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그리고 마귀는 중상자, 비방자라는 뜻의 헬라어다. 즉 사탄은 히브리어, 마귀는 헬라어로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계 12:9).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에 마귀라는 말이 없는 것도 그 이유다. 반면에 귀신은 예수님이 ‘마귀와 그 사자들’(마 25:42)이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사탄(마귀)이 부리는 종, 악한 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교회를 보면 사탄, 귀신의 존재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귀신 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될 정도다. 성령을 받는 것은 신자에게 필수사항으로 다루면서 귀신의 존재와 ‘귀신 들림’에 관해서는 알기를 외면한다. 기독교인의 대화에 누군가가 귀신 이야기를 하면 ‘이단에 빠진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
귀신파로 불리는 단체가 귀신의 존재와 활동을 강조하긴 하지만 몸이 병든 것이나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을 귀신 들린 것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귀신의 실상을 알지 못한다. 귀신 들림 현상이 질병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면 몸이 건강하거나 사회적, 의학적으로 정신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귀신과 관계없는 것으로 인정될 것이다.
굳이 귀신파가 아니라 해도 귀신 들린 것을 정신적 문제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성경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자의 증상이 정신적으로 온전치 않은 모습과 행동을 보인 것이 대부분이라는 이유로 정신적 발작을 귀신 들린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귀신에 대한 보편적 지식으로 굳어져 있기에 정신적인 문제가 없거나 모든 면에서 정상으로 판단되는 사람은 자신을 결코 귀신 들린 자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결론은 귀신을 모른다는 것이다. 결국 귀신은 교회가 자신의 정체와 활동에 무지하다는 점에서 쾌재를 부를 것이다. 교회를 마귀의 의도대로 예수의 훼방자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귀신 들림은 질병이나 정신병 같은 신체적 증상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귀신 들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이해하고 인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자신의 신앙생활이나 인간 됨과 행동을 돌아보면 큰 문제 없이 바르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과 자신에 대한 그러한 판단이 이미 마귀에게 장악된 인간의 왜곡된 시각이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난다.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예수를 만난 귀신 들린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나이까’라며 소리 지른다. 사람이 아니라 귀신들의 외침이다. 그리고 예수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주소서’라고 간구하고 ‘가라’는 말씀을 듣고 돼지 떼에 들어갔는데 모든 돼지 떼가 바다에 들어가 물에서 몰사한다.
예수를 만난 귀신이 거부한 것은 예수로 인한 괴로움이다. 귀신은 예수를 자신을 괴롭게 하려고 오신 분으로 안다. 그리고 그런 예수와 나는 상관이 없다며 관계를 부인한다. 괴롭게 하는 예수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에 대한 귀신의 반응이며 귀신 들림은 이러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당신과 우리는 상관이 없다며 배척한 것이며 그 속에 귀신이 들어와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반응을 비기독교인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예수와 상관이 없다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자신을 구원하고 복을 주는 존재로 안다는 것이다. 믿는 자를 괴롭게 하는 예수에 대해서는 모른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라고 말씀하셨다. 이 동네에서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신다. 박해받는 제자들을 지켜주고 도와주며 박해한 자를 당장 심판하여 제자의 편을 들어주는 예수가 아니다. 예수로 인해 미움과 박해를 받을 때 끝까지 견디라는 말씀이 전부다.
과연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기를 원하는가? 사람들의 믿음에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예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로 인해 괴롭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나의 유익을 위한 예수로만 생각하게 하는 것이 귀신의 활동인 것이다.
예수님이 돼지 떼에 들여보내달라는 귀신들의 간구를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귀신들을 쫓아 버렸다면 돼지 떼가 몰사하는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로 인해 평안이 깨어지고 돼지가 몰사하는 피해를 보았으니 자기들에게서 떠나달라고 한다. 이것이 자신을 위한 예수로 믿는 자의 사고방식이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일 뿐이다.
귀신의 목적은 우리를 예수님의 관계에서 끊는 것이다. 죽음을 죽음이 아니라 희망으로 보게 한다. 돼지 떼가 바다로 달려가 몰사한 것도 죽음의 바다에서 죽음을 보지 못한 결과다. 자신의 선함과 열심에 가려 자신에게서 죽음을 보지 못하고 자기 의를 희망으로 삼는 것이 멸망으로 달려가는 돼지와 다르지 않다. 나의 선함과 의가 있으니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의와는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귀신의 존재를 알아야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의 위대함을 안다. 신자가 자신을 죽음의 존재로 보게 되고 피의 은혜로 감사하는 것이 예수님이 마귀와 귀신의 방해 활동을 이기신 결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