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5:10

by 신윤식 posted Aug 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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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인간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부끄러움으로 인식하게 된 상태에서는 행함의 선악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바른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부끄러움을 알게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신을 가린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힌다. 인간이 만들어 가린 것 위에 덧입힌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을 제거하고 가죽옷으로 교체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찾아오신 것은 죽음을 초래한 죄를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수치를 가리기 위해 만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교체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죄로 인해 죽은 인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개입이다.

 

 

이처럼 하나님에 의해 가죽옷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먼저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벗겨지고 벌거벗은 몸이 드러나는 것이다. 벌거벗은 몸의 수치가 드러나지 않고는 가죽옷으로 교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죽옷으로 교체된 자가 성도를 의미한다면 성도는 벌거벗은 수치가 드러난 경험이 있는 자가 된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인간은 죽음의 존재로 드러난다. 날을 지키고 음식을 가리며 자신의 믿음을 위해 힘쓴 모든 노력도 죽음의 죄를 덮을 수 없다. 그렇게 믿음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로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대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았다거나 말씀을 지키고 실천했다고 자부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는 바른 인간으로 설 수 없는 심판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대에서 인간이 행한 것이 인정되어 참된 믿음으로 판단되는 일은 없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14:10)고 말한 바울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도 나타나게 될 것을 말한 것이다.

 

 

바울의 말을 문자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심판대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하나님의 심판대로 구분되어 있다고 말한다. 죽음 이후에 신자와 불신자는 각각 다른 심판대로 가게 되는데 불신자는 하나님의 심판대로 가고 신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로 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고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 한다(14:11,12)는 구절을 인용해서 불신자는 하나님의 심판대로 가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그에 따라 형벌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계 20:1절에서 언급되는 흰 보좌라는 용어를 따라 하나님의 심판대를 백보좌 심판으로 부르기도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해 보상적 차원의 심판으로 말한다. 신자가 죽기 전 몸으로 살면서 행한 것에 대한 심판이며 죄에 대한 것이 아니기에 지옥의 형벌을 받는 하나님의 심판대와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급의 차등이 등장한다. 행함이 많을수록 상이 쌓이고 적으면 상이 없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기에 행함으로 심판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십자가와 관계없이 인간의 상상에서 만들어진 가상현실일 뿐이다. 자기 자신이 선한 행함을 만들어 낸다 해도 부끄러움을 알게 된 인간으로 이미 심판에 갇힌 저주받은 처지임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대든 그리스도의 심판대든 심판대에 서는 것은 성도에게 해당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라는 말씀대로 믿지 않은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아 저주에 갇힌 처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심판을 받은 자를 다시 심판대에 세워 믿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을 내리는 심판대는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본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두가 심판에 갇힌 자로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아는 자가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행함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아예 자신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성도는 자신이 벌써 심판을 받아 저주에 갇힌 처지에 있음을 아는 자로 십자가 앞에 서게 된다. 이러한 성도에게 십자가는 자기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은 존재 임을 쉬지 않고 확인시켜주는 현장이 된다. 그리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하나님께 감사한다(1:13). 이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 붙들린 자로 본다는 뜻이다.

 

 

성도는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은 없다.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서 모든 죄가 예수의 피로 가려져 거룩하고 흠 없는 완전한 자로 인정받게 하신 예수님의 공로가 자랑 되는 삶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이 어떻게 행하며 살아가는가의 문제에 빠지지 않는다.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살고 계신다면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을 판단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상을 받는 심판은 없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피로 성취된 구원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행한 일의 경중이 아니라 주의 피로 구원받은 의인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즉 우리의 행함이 어떻든 받는 것은 주의 피로 성취된 의다.

 

 

 

성도는 매일 같이 말씀에 의해 자기 죽음을 확인한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은 없으며, 저주에 갇힌 자를 찾아오셔서 아들의 이름을 믿게 하신 것도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한 주의 일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대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을 본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말씀에 이끌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