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4

by 신윤식 posted Sep 1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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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4)

 

바울은 성도를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로 말한다(고후 5:17). 이전의 상태에서 부족하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고쳐서 쓸만한 인간이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이전 것은 죽고 없는 새로운 상태의 새것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한 방식 또한 기존의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속죄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점에서 성도는 인간의 방식으로는 도무지 나타날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의지와 열심으로 자신을 성도답게 만들어 가는 이전의 방식과는 결별 된다.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완전성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완전함으로 믿는 믿음에서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거나 더 나은 상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원수의 행동임을 아는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의 인간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고 알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성도에게 모든 것은 처음의 의미로 다가온다. 시간이나 순서를 의미하는 처음이 아니라 이전의 것을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처음이다. ‘처음 사랑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어떤 음식을 먹고 지금까지 이런 맛은 처음이다라고 감탄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즉 처음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증거된 세상에 없는 최고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에베소 교회를 향한 책망이다. 문제는 이것을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찾아서 사랑이 있는 바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을 본문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다. 하지만 하나같이 예수를 처음 믿을 때의 열심 있는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초신자였을 때의 열심이 시간이 흐르면서 식어지고 게을러진 것을 지적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결국 처음 사랑을 빌미로 교회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것인데 전형적인 사탄의 설교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연 우리에게 처음 사랑을 인지할 능력이 있느냐는 것이다. 처음 사랑을 처음 사랑으로 알아볼 안목이 있어야 너 처음 사랑을 버렸다라는 책망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다음에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으로의 연결이 가능하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 모든 말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처음 사랑을 사랑으로 알고 받아들일 능력도 안목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베소 교회를 시작하여 일곱 교회에 한 편지를 지금 교회로 모이는 우리에게 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가 아니고 우리의 능력과는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다스림 받는 성도로 구축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으로 맺어지는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절에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편지의 수신자는 교회의 사자, 즉 천사이지 교회로 자처하는 인간의 종교 집단이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이 편지의 수신자라면 그 내용을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이 일하시고 다스리신다. 예수님이 오른손으로 일곱 교회의 사자를 의미하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교회를 의미하는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다(1:20). 따라서 인간의 활동으로 세워지고 만들어지는 교회는 없다.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나타내신 사랑에 의해 존재하는 교회라는 점에서 인간과 무관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소위 교회다운 교회를 꿈꾸며 그러한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참된 사랑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행위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가 처음 사랑이다. 따라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행하는 모든 것도 사랑이 아니다. 이처럼 처음 사랑은 우리를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로 주 앞에 세운다. 이것이 처음 사랑과 함께하는 교회라는 점을 생각하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자랑할만한 자기 행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사람들은 교회의 칭찬에 주목하면서 예수님께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거짓된 것을 드러내며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안다고 말씀한다(2,3).

 

 

사람들은 이것을 에베소 교회처럼 칭찬받는 교회가 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예수님께 칭찬받을 자랑거리를 품고 있는 교회가 되는 것에 뜻을 두는 것이고 그것이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 사랑이 되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칭찬받고 자랑할 것이 없는 심판 받을 자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오른손으로 천사를 붙들고 일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언제나 자랑이 되고자 하는 인간성을 책망받고 회개하면서 처음 행위, 즉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행위를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행위도 인정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행위만 인정하고 기뻐하신다는 점에서 처음 사랑, 처음 행위다. 우리를 교회로 삼으신 처음 사랑, 처음 행위다. 우리를 교회로 세우시고 처음 사랑, 처음 행위인 십자가의 용서를 증거하게 하는 것이 주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