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 5:12

by 신윤식 posted Oct 0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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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딤전 5:12)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으로 아무 희망이 없는 어둠이며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대상으로 드러났다. 또한 하나님의 형벌은 인간의 선함과 노력으로는 피할 수 없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형벌 앞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될 인간의 것은 없다. 따라서 인간이 십자가 외에 가치를 두고 높이는 모든 것은 거짓된 것이다. 즉 인간이 자랑하는 믿음, 선함, 열심 등 모든 것이 거짓되고 헛되다. 예수님을 위해 교회를 나오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거짓말이며 믿음이 아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세상에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시간 맞춰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고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유대 사회를 향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 예수님이 보시는 세상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현재도 다르지 않다. 교회가 많고 기독교인이 몇 명이라 해도 세상에는 믿음이 없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불합리하다는 불만을 품게 된다. 자신에게 믿음이 있고 믿음으로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는 잘못된 시각에서 복과 형통을 정당한 보상으로 기대하기에 슬픔과 고통의 현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정당하지 않은 일로 생각하고 불만과 원망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세상에 믿음이 있고 믿는 자가 있었다면 그들이 몇 명이라 해도 예수님을 빛으로 알고 예수 편에 서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길로 갔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이 죽는 길에서도 원망이 없다. 죽음을 하나님의 정당한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누구도 주를 따르지 않은 세상에 믿음이 없고 믿는 자가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옳다.

 

 

믿음이 없는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곧 처음 믿음이 되신다는 뜻이다. 자기를 위한 길을 가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신 예수님이 처음 믿음이다.

 

 

그렇다면 처음 믿음이라는 말은 인간이 믿음으로 알고 행하던 기존의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으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2:4절의 처음 사랑처럼 시간이나 순서가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믿음을 부정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 없는 세상에 예수님이 처음 믿음이 되시므로 드러난 현실이다.

 

 

만약 처음 믿음을 시간과 순서의 의미로 생각한다면 과연 각자 개인의 어느 시점을 처음 믿음으로 규정해야 할지 혼란을 피할 수 없다.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을 때가 처음 믿음일까? 그것은 교회를 나오면서부터 믿음이 있었다는 뜻이 되고 처음 믿음의 일시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언제 믿음이 있게 되었는지 날과 시를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가짜다. 성경은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믿음이 되신다면 처음 믿음을 저버린 것은 곧 예수님을 저버린 것이 된다. 바울은 이것을 젊은 과부가 시집가고자 하는 것으로 연결하여 말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응은 정죄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과부가 다시 시집가고자 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결국 처음 믿음을 저버린 자로 정죄 받지 않으려면 과부가 되어도 시집가지 않고 홀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문자적 해석에 따른 혼란이다.

 

 

바울의 말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아니라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 그것도 나이가 육십이 덜된 젊은 과부를 당황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남자와 과부가 아닌 여인은 본문을 본다 해도 긴장이 없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경은 모든 성도에게 적용된다는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다.

 

 

과부는 남편이 죽어서 홀로 된 여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이것은 세상의 시각이고 바울은 다른 시각에서 말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먼저 고대 사회에서 시집간 여자가 남편이 죽고 홀로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의지하던 힘을 잃어버린 것을 뜻한다. 여자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부가 자기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힘이 될 의지할 대상을 찾는 것이고 그것이 곧 시집을 가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바울은 5절에서 참 과부에 대해 말한다. 그는 세상에서 의지할 것이 없는 외로운 자다. 다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간구와 기도를 할 뿐이다. 자기 인생을 위해 간구와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신 대로 산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성도를 참 과부로 만든다.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는 외로운 자가 되게 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바울은 이것을 참 과부가 아닌 젊은 과부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힘이 되고 의지할 대상을 찾아 시집가고자 하는 젊은 과부에게 젊다는 것은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며 젊음을 자랑하며 늙은 여자보다 더 낫다고 여기게 된다. 바울은 이것을 참 과부로서의 성도가 아닌 것으로 말한다.

 

 

세상에 믿음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해도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신을 찾는 수준에서 드러난다. 즉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는 외로운 참 과부가 아니라 힘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서 인생을 잘 살고 싶은 정욕으로 찾는 젊은 과부로 하나님을 찾는다. 예수님은 이러한 젊은 과부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고 이것을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처음 믿음을 저버린 것으로 말한다.

 

 

처음 믿음은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살게 하는 힘으로 오지 않았다. 그러한 믿음은 정욕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를 위해 만들어 낸 거짓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위한 신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이 자기 정욕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참된 믿음인 처음 믿음을 저버린 것이다.

 

 

 

자기 인생에 도움을 줄 대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젊은 과부의 행실이며 믿음이 아니기에 정죄를 받는다는 것이 바울의 선언이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의 나이를 육십으로 말한 것도 젊다는 의지할 조건이 없는 것이 참 과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이 무너진 가운데서 외로운 자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 처음 믿음에 합류된 참 과부로서의 성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