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7:49

by 신윤식 posted Dec 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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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삼상 17:49)

 

다윗의 일대기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의 의미로, 또는 정의로운 약자가 불의한 강자를 상대로 싸워 승리하는 의미로 인용되어 사람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러한 해석은 듣기 좋은 공허한 말로 그칠 뿐이다. 힘 있는 자가 이기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서 실현 가능성 또한 희박한 말이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7)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에게 속한 전쟁은 칼과 창으로 자기를 위한 승리를 얻는 것이 목적이지만 여호와께 속한 전쟁은 칼과 창의 방식이 아닐뿐더러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위한 승리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여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를 위한 전쟁이다.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버틸 수 있고, 복과 구원 또한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승리하여 얻어야 할 전리품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약한 믿음으로는 구원을 장담할 수 없다는 조바심이 있게 되면서, 승리 즉 구원을 위해 효력 있는 칼과 창으로 무장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구원을 위한 칼과 창으로 작용하는 것은 철저한 율법 준수다. 현대 기독교인 또한 말씀을 실천하는 행함이 구원을 위한 칼과 창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신앙생활로 가르쳐지는 행위 하나하나가 자기 구원을 위해 준비하는 칼과 창이 되는 것이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말한다.

 

 

칼과 창과 단창은 블레셋 사람의 손에 있는 반면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은 다윗의 손에 있지 않다. 다윗은 자기 손에 없는 것으로 칼과 창과 단창을 가진 블레셋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다. 다윗이 싸움을 여호와가 아닌 자신에게 속한 자기의 싸움으로 인식했다면 블레셋 사람이 가진 것보다 더 강한 칼과 창과 단창을 하나님께 구했을 것이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전쟁 방식이다. 자신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블레셋 사람의 방식으로 전쟁한다. 자기를 위해 전쟁하고 자기를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신앙생활의 목적도 자신의 이익과 승리에 있다. 궁극적으로 자기 이름이 높임 받는 것에 뜻을 둔다. 하지만 여호와의 구원은 인간이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방식인 칼과 창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고유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시며 이는 곧 인간의 모든 방식은 거부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면 다윗이 물매와 돌로 골리앗을 이긴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다윗의 승리를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 믿음의 결과로 말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라는 말을 생각하면 의문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어쨌든 다윗에게는 칼과 창에 해당하는 물매와 돌이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물매와 돌은 칼과 창에 비교해서 무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것이지만 양을 치던 다윗에게는 이미 손에 익숙한 무기다. 곰이나 사자로부터 양을 보호하면서 물맷돌을 정확히 던지는 기술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물맷돌을 던지는 자신의 실력에 하나님의 힘이 더해져서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고 믿은 것인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윗이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 죽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돌로 곰과 사자를 물리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이마를 맞히는 것임을 생각하면,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골리앗의 유일한 급소라고 할 수 있는 이마를 쳤다는 것에 크게 의미 둘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나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는 말과 물맷돌로 이마를 쳐서 승리하는 방식이 연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게 됨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을 이마와 마음이 굳은 자로 말씀한다(3:7). 마음과 함께 이마를 거론하시는 이유는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13:16)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손의 기호와 미간의 표가 되는 것은 어린양의 피로 인한 출애굽이다. 따라서 미간의 표가 지워지지 않은 이스라엘이라면 스스로 거룩해질 수 없는 더러운 자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율법을 준수하고 지켜서 거룩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고 그것을 이마와 마음이 굳은 자로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이마가 굳은 상태의 이스라엘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어린양의 피에서 찾지 않는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을 상대할 때 그보다 강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외적인 강한 힘에 비해 자신들의 약한 힘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며 두려워하는 것이 이마가 굳은 상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기 힘을 믿고 칼과 창으로 이스라엘을 상대하는 골리앗과 같다.

 

 

골리앗의 이마는 이스라엘의 굳은 이마와 다르지 않다. 칼과 창을 믿는 것이 그러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다윗으로 하여금 돌로 이마를 쳐서 죽게 하심으로 인간이 믿고 의지하는 것의 헛됨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하신 어린양의 피에 있음을 보이신 싸움이다. 어린양의 피가 이마에 표가 된 그들이 거룩함을 입은 이기는 자이고, 이마에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 즉 언약 백성이다(7:4). 이들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피의 은혜만 증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