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딛 3:1)
비상 계엄령을 선포한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내란이다’, ‘내란이 아니라 대통령의 고도의 통치 행위다’라며 서로 극렬히 대립한다. 국민 또한 대통령이 옳다며 동조하는 사람과 내란의 수괴이니 탄핵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어 각각 국회의사당과 광화문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집회 중이다.
누군가가 전화하여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은가?’를 묻는다.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라는 성경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대로라면 통치자인 대통령이 선포한 계엄령에 반대하지 않고 따라야 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탄핵 집회에 나가면 안 되는가? 라는 질문이다.
질문한 분에게 ‘지금까지 성경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하며 살아왔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아니오’라고 답한다. ‘그런데 왜 계엄령에 복종해야 하는가에 신경을 씁니까? 계엄령에 복종하든 복종하지 않든 믿음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집회에 나가도 죄인이고 나가지 않아도 죄인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를 생각하는 것은 옳은 행동을 통해 자신을 믿음 있는 자로 나타내고 싶은 악함입니다’라고 말했더니 ‘아, 알겠습니다’라고 한마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뭘 알았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그나저나 질문한 분의 말처럼 바울은 무슨 뜻으로 통치자들과 권세잡은 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라고 한 것인가? 그뿐만이 아니라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라는 말까지 한다.
문자가 드러낸 대로 이해하자면 기독교인은 통치자인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일에 대해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말고 관용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만약 그러한 자세로 통치자가 어떻게 정치를 하든 무조건 인정하고 관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하루하루를 고구마 백 개 먹은 느낌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의 권세는 국가에 작용한다. 따라서 국가에 속한 모든 것은 권세의 영향 아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국가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다. 통치자를 잘 세우면 국가가 발전하고 자기 삶의 환경 또한 좋아진다는 것이다.
국가는 법으로 질서를 유지한다. 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질서가 무너지고 국가는 혼돈에 빠지기 때문에 법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다. 비록 한 개인이 자기 양심과 신앙에 따른 행동이라 주장해도 법에서 벗어난 것이면 처벌받는다. 국가의 법으로 선과 악을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이 곧 권세가 되고 통치자는 법에 의해 권세가 부여되고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며 운영하는 주체가 된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국가는 무엇일까? 성경의 시각에서 인간의 권세가 작용하는 국가는 어둠의 세력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으로 말한다. 즉 국가는 정죄 받아야 할 인간의 나라일 뿐이다.
이러한 국가에서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육신이 잘되고 행복을 누리다가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되는가? 이것이 인간이 원하는 것이지만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성도는 하나님이 그 길을 인도하신다. 믿음도 성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성도가 모이고 함께 하는 교회 또한 하나님의 권세로 다스려진다.
그런데 만약 세상 권세자가 교회를 핍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 힘을 모아 대항해야 할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바울은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유는 신앙이든 교회든 하나님의 인도와 권세 아래 있는 성도는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으로 훼손되거나 지켜지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인생을 산다. 이것이 통치자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비방하지 말고 관용하라는 말의 의미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통치자도 하나님에 위해 세워지고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성도를 가르치기 위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국가라는 세상을 살면서 죄를 실감하고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평안이 주께 있음을 깨달으며 주를 바라보는 삶의 자세를 가지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조성하신 환경이다.
골 2:15절에서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라고 말한다.
당시 국가의 통치자와 권세 잡은 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어떻게 승리하신 것이 되는가? 그 이유는 십자가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지만 통치자와 권세자의 국가는 결국 심판으로 소멸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에게 국가라는 세상은 예수님의 승리로 드러난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한 현장이며 그 일을 위해 살게 하신다. 따라서 성도에게 세상은 싸움판이다.
엡 6:12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라고 말한다.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함께 말하는 것은 통치자와 권세들 배후에 악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통치자나 세상 주관자들의 공통점은 자기의 권세, 힘을 자기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을 다스리는 악한 영이 배후에서 활동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싸움의 상대자는 통치자의 배후에 있는 악한 영이 된다. 그리고 그 악한 영이 우리의 배후에도 있다.
악한 영은 너의 힘으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고 한다. 이것을 악한 영의 소리로 분별하는 자가 성도다. 성도는 자신의 믿음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 없다. 그래서 자신의 혈과 육을 상대하는 씨름이 아니다.
성도는 어떻게 산다 해도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억지의 말로 정당함을 주장하는 대통령에게 화를 내도 성도다. 그러면서 통치자가 다스리는 국가를 잠시 있다가 떠날 곳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