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신 8:5)
믿음에 있어서 인간의 결정적인 오류는 믿음에 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못하는가에 따라 믿음의 질과 수준이 달라지는 것으로 배워왔고 그렇게 알고 있다. 그래서 좋은 믿음이 되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의 믿음이 어떤가에 따라 달라지고 복과 구원의 여부도 인간의 믿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성경이다. 이런 가르침 속에서 기독교인의 관심은 자연히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으로 향한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보다 자신의 행함에 더 중요성을 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은 한다. 그런데 구원받는 대상을 차별한다. ‘예수님의 피로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믿음이 좋지 않은데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인간적인 생각이 십자가의 피가 아닌 자기 행함에 시선을 두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행함이 미흡하다고 생각되면 불안과 두려움이 있게 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믿음이라고 생각되는 행함에 힘을 쓰게 된다. 이것이 자기 행함이 미흡한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사탄에 의한 것임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며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실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징계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당연히 믿음이 좋지 않아 죄를 범한 자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의 의미로 해석한다. 징계가 있다는 것은 죄를 범했다는 증거고 그것은 곧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시각이다. 그래서 평온하던 삶에 문제가 있게 되면 교회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하는 것이다.
징계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욥의 친구들에게서 확실히 드러난다. 엘리바스라는 욥의 친구는 욥에게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라는 말을 한다.
자신은 믿음이 좋아서 죄를 범하지 않았고 그 결과로 징계가 없는 평안 가운데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가운데서 하는 충고다. 한마디로 말해서 삶에 힘든 문제가 생기는 것은 본인의 믿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이 믿음에 문제가 없는 사람의 삶을 힘들게 하실 이유가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욥 친구들의 생각이 곧 지금 기독교인의 생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징계’라는 단어를 두려움으로 반응한다. 징계로 인해 삶의 평온이 깨어지고 원하지 않은 힘든 일을 겪게 된다는 예상에 ‘혹시 징계받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관심은 언제나 자기에게로 향한다는 증거다. 이것이 인간의 본심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자기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믿음도 자기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헛된 믿음이며 이 믿음으로 십자가에 관심을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하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라고 한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징계가 떠나지 않는 것이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죄를 떠나지 않은 자로 하나님께 징계받아야 할 자일 뿐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은 징계하시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에 함께 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아들로 대하시는 아버지의 관계에서 행하시는 은혜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말씀을 지키는 좋은 믿음으로 징계가 아닌 복을 받겠다는 것은 믿음과 하나님을 자기 것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범죄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인간에게서 출발한 탐욕으로서의 믿음을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이 믿음이 우리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지켜지는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설교에 인간을 위한 믿음은 없다. 다만 죄로 인해 저주 아래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로 이루신 중보자 예수님의 공로만 이야기할 뿐이며 예수님이 하신 은혜의 일이 감사가 되게 하는 설교만 있다.
인간의 행함은 애당초 선악으로 구분될 성질이 아니다. 죄로 드러날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함을 선악으로 구분하여 선한 것을 뽑아내는 것이 선악 지식이며 그것으로 인간은 홍수 심판이 증거하는 것처럼 멸망 받을 죄인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결론은 인간이 나름대로 선을 행한다 해도 징벌받을 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어리석어서 자신의 악함을 파악하지 못한다. 항상 행함으로 저울질하기 때문에 선과 악을 왔다 갔다 한다. 죄를 범할 때가 있고 범하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죄인의 자리에 박혀 있음을 모른다. 교회를 다니고 착하게 살고 선을 행한다 해도 죄인의 자리에 있는 인간 됨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에게 행해지는 징계는 나의 믿음, 나의 선한 행함, 나의 열심처럼 나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것을 헛되고 거짓된 것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주의 공로를 바라보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다움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에 있음을 알게 하고 ‘관계’라는 끊어지지 않는 사랑에 감사하게 하는 뜻으로 베풀어지는 은혜로 인식되어야 한다.
징계 없는 아들은 없다. 욥의 친구처럼 믿음이 좋으면 징계가 없다는 시각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다. 징계는 욥과 같은 재난으로만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탐욕으로 충만한 인생이 원한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징계다.
그러므로 육신이 평안하다 해도 사실은 징계 가운데 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곧 인생의 형통함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의 형통이 되는 주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 징계의 뜻이고 이유다. 이러한 징계가 없다는 것은 그가 사생자라는 것이고(히 12:8),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신 23:2). 그래서 징계는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된 총회의 회원이 되게 하는 은혜이기에 삶은 힘들어도 영혼의 기쁨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