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4:1-3>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240103.mp4
<본문>
1.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칠 세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요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2.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3.여호야다가 그를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더니 자녀를 낳았더라
<설교 요약>
사람들은 죄를 구원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죄를 줄이거나 극복하면 구원에 더 가까워지고, 많이 범할수록 멀어진다고 생각하여 죄의 유혹을 이겨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죄를 통제하고 극복하여 구원에 이르겠다는 태도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을 하였다”(롬 5:21)라고 말합니다. 이는 죄를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는 권세로 규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다시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롬 6:12)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에게 왕 노릇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러한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은 서로 맞지 않은 모순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한 답을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라는 말로 제시합니다. 즉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는 것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부패한 인간은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의 통치 아래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싸워서 이겨야 하는 외부의 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인간의 행함이 중심에 자리한 소위 ‘실천적 믿음’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러한 잘못된 믿음이 구원을 하나님의 전적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공로가 혼합된 것으로 전환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하는 근본 이유를 단순히 죄가 강하고 인간이 약하기 때문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탄이 선악과로 인간을 유혹했을 때 죄는 노골적인 악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위한 척 거짓된 선한 의도로 위장하여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한 것처럼(고후 11:14) 악은 언제나 인간이 알 수 있도록 노출된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를 알지 못하기에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또한 바울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선한 계명조차 왜곡된 죄 아래에서 자기 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용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죄는 세상 기준에 속한 도덕적 일탈이나 종교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중심적 신뢰 구조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정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거짓말을 하지 않는 바른 삶’이라는 도덕으로 생각한다면 정직을 실천하여 자신의 바른 믿음을 증명하고 의를 확보하려는 시도로 나아갈 것이며 그것이 자기를 신뢰하는 죄로 드러납니다. 외형적으로는 예수를 믿는 성도답게 살려는 열심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신뢰하는 죄를 선으로 오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에 대한 인식의 왜곡으로 인해서 죄를 죄로 보지 못하는 것이고,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도덕적 미숙함이나 종교적 실천의 부족이 아니라 영적 어두움으로 규정합니다.
요아스의 ‘정직한 행함’은 인간의 도덕 기준이나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말에 따라 하나님의 시각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바르고 정직해 보이는 행위는 본문을 이해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가 보시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짧은 문구라 할지라도 그저 단순한 수식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인간 중심적 가치 체계를 철저히 부정하는 선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성경을 보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요아스의 정직한 행함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라는 문구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왕하 12:2절에서는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는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즉 정직은 요아스 개인의 경건이나 도덕성이 아니라 제사장의 교훈 아래에 있을 때 나타나는 상태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교훈은 단순한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나 선한 정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일은 성전에서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유다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임을 전제하고 피의 속죄를 나타내는 직분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의 바른 교훈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실상,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원수임을 드러내는 선포입니다.
왕이라 해도 피의 용서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원수임을 밝히는 것이 제사장의 바른 교훈입니다. 이러한 교훈 아래에서 원수 된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감사하는 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행함으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정직’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 아래 자신을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회개입니다.
시 51편에서 다윗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나이다”(51:4)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특정 사건에 국한된 회개가 아닙니다. 다윗은 이어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51:5)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나는 어떤 죄를 지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인간의 본질로 향합니다. 자신이 처음부터 죄악 중에 출생한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이며,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자의 회개로 드러납니다.
성도가 정직하게 행하는 것은 자신을 죄와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며, 자기 의가 무너지고 대신 십자가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원수로 알고 긍휼만을 바라는 정직한 성도만이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성도는 그렇게 자기 의가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