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6:16-23>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261623.mp4
<본문>
16.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17.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18.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19.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20.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21.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
22.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23.웃시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는 나병환자라 하여 왕들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의 조상들의 곁에 장사하니라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설교 요약>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단체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근거로 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경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이라 하고, 구원의 길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작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이러한 지적을 절대적으로 부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읽기, 성경 공부, 말씀 실천에 힘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성경에 관심을 두고 있는 증거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성경에 참된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먼저 성경이 인간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피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따라 인간을 살핀다면, 하나님께서 단순히 성경을 읽는 행위나 말씀을 실천하려는 의지 자체를 신앙으로 인정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이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의 행위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은 인간을 한순간도 하나님을 바르게 신앙할 수 있는 존재로 말하지 않으며 다만 죄로 인해 죽은 자로 규정할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바르게 신앙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곧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으로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굳건히 믿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결국 소유의 번성과 삶의 형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소유가 늘어나고 삶이 형통하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문제가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다면 축복이 아니라 징벌이 주어지는 것이 옳다는 전제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에 의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성경의 말씀에서 확인하기보다는 이미 믿고 있는 지식대로 자신의 형편과 삶의 결과에서 확인하려 하게 됩니다. 그래서 형통과 번영이 신앙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고,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착각이며, 성경은 이것을 패망의 선봉으로 증거되는 교만으로 말한다는 점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것을 본문의 웃시야의 이야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은 웃시야가 강성해진 후 마음이 교만해져 악을 행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웃시야의 교만에 대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웃시야의 교만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강성해져서 힘을 갖게 되었을 때 그 힘을 과시하면서 약자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자가 그러한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힘과 권세라는 사실을 망각한 교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웃시야의 교만을 단순히 권력을 남용하거나 약자를 압제하는 행위가 아니라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에서의 질서와 경계를 넘어선 것이고, 웃시야가 하나님 앞에서 서야 할 위치를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웃시야의 교만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난 교만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분향은 오직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에게만 허락된 직무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외의 사람이 성소에 가까이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 3:10). 그런데 웃시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규례도 무시한 채 자기가 직접 분향하려고 한 것입니다.
웃시야가 이 규례를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설령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제사장 아사랴가 "분향하는 일은 구별하심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때 자기 잘못을 깨닫고 성소에서 나갔어야 합니다. 하지만 웃시야는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분향 행위를 범죄로 여기지 않았고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 할 일, 즉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웃시야를 형통하게 하시고 강성하게 하신 것은 분향하는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강성해진 후에 굳이 제사장 외에는 금지된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번성과 형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비롯된 결과로 이해하는 인간의 종교적 사고방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웃시야는 자신이 강성해진 사실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다는 증거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그러한 확신은 자신에게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있으며, 심지어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분향까지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는 착각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웃시야의 교만은 단순히 분향에 관한 규례를 어긴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저주의 존재라는 선을 넘어서, 자신의 형통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위치를 스스로 높인 것이고, 성경은 이러한 모습을 가리켜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한 것"이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 16:18절의 말씀처럼 이러한 교만이 인간을 패망으로 이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웃시야가 제사장의 말에 화를 냈을 때 그의 이마에 저주의 증거인 나병이 생깁니다. 그것으로 웃시야는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으로부터 끊어져 별궁에서 격리되어 살다가 죽은 후에도 나병 환자로 장사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웃시야를 강성하게 하셨다고 할지라도 변하지 않은 것은 저주라는 웃시야의 본질, 즉 인간의 본래 위치입니다. 이것은 신 28장에서 말하는 축복을 받아 누린다고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저주받은 자에게 베풀어진 은혜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축복에는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고, 그 복을 자신의 신앙과 연결하여 자기를 바르다고 판단하는 것을, 하나님은 교만하여 악을 행한 것으로 보신다는 것이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행위와 관계없이 인간은 저주받은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로지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피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