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7:1-9>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270109.mp4
<본문>
1.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요 사독의 딸이더라
2.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3.그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하고
4.유다 산중에 성읍들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에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하고
5.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백 달란트와 밀 만 고르와 보리 만 고르를 바쳤고 제이년과 제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바쳤더라
6.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7.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8.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요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지 십육 년이라
9.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설교 요약>
웃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을 찾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시고 강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요담 역시 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였다는 평가와 함께, 바른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해졌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성도의 형통과 강성함이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찾는 신실한 신앙의 결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신앙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상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통과 강성, 즉 복의 원칙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을 찾고 바른길을 가는 신앙적 순종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의 문제에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웃시야와 요담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고 바른길을 걸었다는 이유로 형통과 강성함의 복을 받는다면 과연 그 복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복을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고 누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 복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복을 감당한다"라는 말의 의미조차 낯설게 느껴질 수 있으며 그런 말을 듣는다 해도 관심조차 두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인이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유는 결국 복을 얻기 위한 열망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사업이 잘되며, 가정이 평안해지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면 마치 신앙의 목적이 달성된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복을 받았다면 그 복을 바르게 감당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해 낯설게 느껴지고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강성하게 하신 사람들이 보여준 삶을 살펴보면, 인간은 복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다윗과 솔로몬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높이시고 그의 나라를 강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권이 견고해지고 모든 것이 형통한 때에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는 중대한 죄를 범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부와 영광을 누리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대를 누렸지만, 많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고 결국 그들의 영향으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복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에 의한 형통과 강성함을 자기 영광과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부와 힘을 누리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여전히 악을 행하는 자로 바라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웃시야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웃시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강성하게 하셨을 때 오히려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교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강성하게 하신 것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대한 증거로 오해하고,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분향을 스스로 행하려 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웃시야를 쳐서 나병이 생기게 하여, 인간이 형통하고 강성하게 된다고 해도, 저주라는 본질 자체가 변화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은혜가 인간의 죄 된 본성을 제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자기 영광으로 바꾸어 버리는 죄성이 여전히 인간 안에 살아서 활동하는 저주의 존재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요담 역시 하나님 앞에서 바른길을 걸었기에 점점 강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요담이 걸었던 '바른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관심이 바른길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바른길이 무엇인지를 묻고 찾습니다. 하지만 그 관심의 중심을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보다 요담처럼 강성해지고 형통해지기를 원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결과와 복에 더 기울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중요한 내용은 우리가 바른길을 알고 그 길을 걸음으로 강하게 되는 복을 얻는 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강해지는 복을 얻는다 해도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저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문제를 소홀히 생각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예 잊어버리고 웃시야와 같은 교만의 악을 행하면서도 스스로는 바른 신앙의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심각한 사태에 직면해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백성이 여전히 부패하였더라"라고 말하는 것은 유다 백성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부패한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요담이 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고 웃시야처럼 교만하여 악을 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상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요담은 바르고 백성들은 부패했다는 의미일까요?
왕하 15:34-35절을 보면 요담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지만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백성들의 부패한 상태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웃시야가 자신의 위치와 본분을 망각한 채 성전에서 분향하려 했던 것처럼, 백성들 역시 인간의 본질을 알지 못한 채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부패로 규정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직하게 살고 바른길을 걸으려고 힘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와 부패의 본성이 자리한 인간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벗어날 수 없는 실존적 현실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끊임없이 드러냄으로써, 구원이 인간의 행위나 경건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에 있음을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부패의 자리로 끌어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되는 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깨닫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새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 된 성도는 죄인 된 자리에서 새 언약이 되신 예수님을 참된 복으로 믿기에,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이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