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15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18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19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설교>
신앙과 신앙 아닌 것의 차이는 간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을 믿느냐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느냐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신앙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의 유다의 형편이었습니다.
당시 유다의 주변은 온통 강대국들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다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강대국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강대국의 보호를 받음으로 자신들의 미래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 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에게 하나님은 이미 멀리 있는 분이었을 뿐입니다. 힘이 아니고 반석도 아니며 피난처도 아니었습니다. 그들 눈에는 강대국의 힘만 보였을 뿐이고, 그 힘을 자신들의 피난처로 도움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다에게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보내시면서 두 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살구나무 가지고 또 하나는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져 있는 끓는 가마입니다. 하나님은 이 환상으로 유다가 어떤 형편에 있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네가 무엇을 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즉 예레미야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제가 본 것은 이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보고 본 그것을 말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입니다.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보게 하신 것을 전합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것을 전합니다. 이처럼 거짓 선지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과는 멀어진 자로 출발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본 거짓 선지자의 말입니다. 왜냐하면 욕망으로 서로 교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선지자도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가 보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욕망에 의해 왜곡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부딪힐 수 있는 말은 아예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예레미야가 본 환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살구나무 가지를 보면 살구나무는 3,4월경에 꽃이 피고 6월경에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살구나무는 잎보다는 꽃이 먼저 핀다고 해서 히브리 사람들은 살구나무를 성급한 나무라는 뜻으로 ‘샤케드’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러한 살구나무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주신 뜻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살구나무 가지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지켜 그대로 이루신다는 것과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살구나무가 성급한 나무로 불리는 것처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급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레미야가 유다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매우 급박한 일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남은 것은 예레미야가 유다에 가서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두 번째 환상으로 보여주십니다. 선지자가 본 것은 끓는 가마의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져 있는 것입니다.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져 있다면 끓는 물이 쏟아질 방향은 당연히 남쪽입니다.
북쪽은 바벨론을 가리키고 남쪽은 유다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끓는 물이 심판을 의미한다면 두 번째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명확해집니다. 유다가 북쪽 바벨론에 의해서 환난을 멸망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선지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것은 유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일, 즉 멸망의 소식을 급히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길을 가야 할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만약 선지자가 자기 이름과 영광에 관심을 둔다면 자연히 하나님이 보여준 말씀을 감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인기를 위해 평안을 말하고 복을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가는 길에 자기 이름과 영광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부르시고 보내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자임을 생각한다면 신자는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부름 받고 보냄 받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길이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한 길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길과 신자의 길이 다를까요? 선지자의 길과 사도의 길이 다를까요? 그리고 선지자의 길과 신자의 길이 다를까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길에서 그 뜻을 세상에 증언하는 자로 부름 받고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신다면 신자의 길이 개인의 복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멸망의 선포입니다. 누가 들어도 기분 나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판보다는 복 받는다는 말이 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강대국과 친교를 맺어야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라면 더욱 더 하나님의 복이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그들에게 심판의 선포는 그들을 더욱 더 절망하게 하는 말일 뿐입니다.
멸망의 선포는 유다의 모든 것을 무익하고 헛된 것으로 규정하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했던 그들의 모든 것들이 신앙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멸망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보면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고 말합니다.
유다의 심판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고 섬긴 것입니다. 그들이 다른 신을 섬긴 것은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방인의 강대함을 그들이 섬기는 신의 도움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방인의 강대함의 배후에도 하나님이 계셨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방인의 신을 가까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성전이 있게 하시고 제물의 피를 흘리는 제사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되는 것이 이스라엘이 사는 길이지만 그들은 보이는 것을 좇을 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강대국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의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에서 멀어져 있는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의에 있고, 하나님의 의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습니다. 신자는 선지자의 증거를 통해서 이 같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