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3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첫 열매라고 일컫습니다(3절). 이스라엘을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수고롭게 일하셔서 맺어진 처음 열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첫 열매로써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존귀한 나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존귀함은 이스라엘이 그만큼 가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과 수고와 희생으로 인해 맺어진 처음 열매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이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삼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으로 인한 열매를 삼키는 것이 되기에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이스라엘을 삼키는 자에게 벌을 내려 재앙이 닥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첫 열매의 가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이방인의 우상을 좇아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긴 것은 자신들도 이방 나라처럼 힘이 있고 경제적으로 풍성한 나라가 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신을 믿는 믿음의 가치를 세상에서 힘이 있고 풍성한 존재가 되는 것에 두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우상을 믿는 것에 더 가치를 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을 섬기는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들보다 더 발전하고 힘 있는 국가로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가치와 목적을 자기 성장에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좇았던 것처럼 자기 성장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과 동일한 우상 섬김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고 그 욕망을 위해 신을 선택하여 섬기는 것이 이방인의 종교이기 때문에 그 같은 사고방식으로 신을 찾는다면 제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부른다고 해도 신앙이 아니며 다만 우상을 좇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가 우리 자신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존귀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구하고 갈망하는 자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이들을 신자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가 하나님의 첫 열매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맺어진 소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여 40년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온통 원망과 불평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육신의 안녕과 편안함만을 원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이방 나라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붙드시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가나안 땅 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가 없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은 이스라엘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들을 존재하게 한다는 고백이 있을 것이고, 세상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가치성을 두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첫 열매인 이스라엘다움입니다.
농부에게 첫 열매는 한 해 동안의 모든 수고와 열심과 땀의 결과물입니다. 그러한 농부가 첫 열매를 바라보는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자신의 수고와 열심과 땀의 결실이기에 첫 열매의 모양과 크기는 상관없이 첫 열매를 보는 것만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첫 열매라고 하시는 것에는 그 같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수고와 열심의 결과로 하나님의 소유로 맺어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같은 첫 열매로서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함으로써 세상에서의 자기 가치를 위해 우상을 좇은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결혼 때의 사랑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제사를 드리면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한 그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인애와 사랑의 관계로 붙드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물의 희생의 피로써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셨고 이 언약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시며 그들을 용서하셨고 결국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이었습니다. 즉 말씀드린 대로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의 산물, 첫 열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첫 열매로 삼으시고 원하신 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깨달았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은혜의 가치는 보지 못하고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존귀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은혜를 입은 자로 산다는 것이 곧 존귀한 자로 여김 받는다는 하늘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신자입니다. 신자는 거룩한 존재로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처럼 오로지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으로 인해 맺어진 하나님의 열매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룩하다는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거룩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러움과 불의가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런 우리가 거룩한 자로 칭함 받고 거룩의 나라에 속하게 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은혜로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이 모든 것도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은혜는 참으로 존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존귀한 은혜가 함께 하고 여전히 은혜로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 첫 열매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첫 열매로 존재합니다. 나의 가치와 힘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과 인자하심이 증거되고 자랑되어야 하는 열매로 존재하는 것이 신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의 형편이 어떠하든 모든 신자에게 동일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생명의 세계에 속한 자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희생이 우리를 살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기쁨이 되고 감사함으로 고백되는 것이 첫 열매다운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