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7강) 선지자의 울음

by 신윤식 posted Apr 2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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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9:1-11http://onlycross.net/videos/jer/jer-09011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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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2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4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5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6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8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

9 내가 이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

11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설교>

 

본문은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면서 통곡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통곡을 하는 그때는 아직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하기 전입니다. 따라서 당시 유다의 현실은 통곡이 필요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눈에 보이는 평화로움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가 내다보는 유다의 진짜 현실은 하나님의 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선지자의 통곡의 내막을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통곡할 일도 없는데 통곡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선지자의 통곡의 내막은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주관하고 유다를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에 말씀으로 되어질 일이 참된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에게는 ‘평안하다’는 말이 거짓이었습니다. 말씀 안에서의 유다의 현실은 평안이 아니라 비참함과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머리가 온통 물이 되고 눈은 눈물 근원이 되어서 예루살렘을 향한 눈물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괴로움으로 통곡하는 선지자의 마음을 알게 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지자 한 개인의 통곡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를 심판해야 하는 하나님의 탄식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유다 백성들의 모습은 거짓을 말하며 땅에서는 강성한데 진실하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유다의 현실을 말씀 안에서 제대로 바라보며 탄식을 하는데 정작 유다는 자신들의 일에 대해 소경처럼 아무것도 보지를 못합니다.

 

 

유다와 선지자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실 유다를 바라보며 유다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유다는 말씀 안에서 자신을 보지 않고 보이는 현실에서 자기 문제를 생각할 뿐입니다. 따라서 평안의 현실에서 잘못된 신앙의 문제는 보지 못하고 다만 현실을 살아가는 문제에만 마음을 두었던 것이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가 유다 때문에 통곡할 이유는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써 할 일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그 말씀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유다입니다. 그런 유다가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당연한 일에 대해 통곡을 하는 것이 오히려 선지자답지 못한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같은 동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통곡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통곡이 같은 동족이 당할 고통 때문이라면 그것은 단지 인간적 연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통곡을 단지 인간적 연민의 차원으로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예레미야 한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통곡은 장차 유다 백성들에게 있을 통곡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차 유다가 멸망을 받았을 때 유다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통곡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눈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통곡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의 통곡은 장차 죄로 인해서 멸망을 받을 유다 백성들의 운명에 함께 함으로써 나오는 통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대 백성들의 운명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는 유다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통곡에도 우리의 마음은 덤덤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과 같은 내용이 우리에게는 너무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말한 대로 옛날이야기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와는 다른 나라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일까요? 만약 그런 것이라면 성경 전체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내용이 되고 맙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님 이야기도 2천 년 전의 이야기고, 다른 나라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운명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해야 하는 것은 유다 백성이 죄의 길에서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음으로 멸망을 받았고, 그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죄의 길을 가는 자들이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고 의지한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실이 평안하다고만 생각합니다. 결국 유다와 우리가 동일한 길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통곡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또한 유다가 다를 바 없이 보이는 현실에 파 묻혀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낳습니다. 평안과 복이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족하게 여길 뿐입니다.

 

 

이런 우리로 인해 통곡하시는 분이 누구일까요? 유다 백성을 위해서 선지자가 통곡한 것처럼 오늘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통곡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죄의 길로 가는 우리 운명에 들어오셔서 통곡하시며 우리 운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을 가신 것입니다. 선지자의 통곡은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가 통곡하는 이유를 모릅니다.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질 현실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울 일이 전혀 아닌데 울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이것이 유다의 형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을 수 없고 보복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해 심각하게 무너진 상태가 유다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이러한 자신들의 현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선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유다의 이 같은 모습이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현실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유다의 현실이 곧 우리의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을 내다보면서 심각해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두려고 합니까?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우리의 운명에 들어오셔서 탄식하시며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은혜에 눈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눈이 열린 그 사람에게서 거짓된 말이 아니라 참된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평안이 아니라 심판과 죄에 대한 말이며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에 대한 말입니다.

 

 

인간의 참된 현실을 보지 못한 모든 말은 거짓입니다. 눈에 보인 대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십자가를 통과하여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참과 거짓을 분별하면서 참된 생명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