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5강) 썩은 허리띠

by 신윤식 posted Jul 0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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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3:1-11http://onlycross.net/videos/jer/jer-13011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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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 하시기로

2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4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5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6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 하시기로

7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니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

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10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설교>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베띠를 사서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허리에 띠자 다시 선지자에게 말씀이 임하기를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4절)고 하십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띠를 유브라데 물가에 감춥니다.

 

 

유브라데는 바벨론 지역에 속한 강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왕복 약 1,000킬로미터쯤 되는 거리라고 합니다. 당시는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서 도보로 다녀올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먼 거리를 다녀오려면 족히 한 달 이상은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다시 선지자에게 이르시기를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 예레미야가 유브라데를 두 번 왕복한 것이 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가 실제로 유브라데를 다녀온 것이 아니라 환상을 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인간의 상식과 이해에 맞게 꿰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이 환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실로 이해하면 됩니다. 어떻게 그 먼 거리를 두 번이나 다녀올 수 있느냐는 것은 우리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본문의 내용이 환상이냐 실제상황이냐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지시하신 이상한 행동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을 인간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에 꿰맞추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브라데 물가에 띠를 숨기고 다시 가서 그 띠를 가져왔을 때는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일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띠의 용도는 허리를 묶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띠가 썩었다면 띠는 원래의 용도대로 사용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현재 처해 있는 형편이라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11절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한 것처럼 이스라엘과 유다의 온 집도 하나님께 속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도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는 이스라엘로 존재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자기의 삶으로만 집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신 또한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눈에는 이방인들의 신이 인간을 위한 신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누구이며 어떤 목적으로 하나님께 부름 받았는가는 잊어버린 채 이방인들과 같은 명예와 영광을 누리기 위해 이방인의 신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았다는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아니라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다가 썩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하신 것은 유다가 썩은 자임을 드러내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띠는 이방인 지역의 유브라데 강의 물에 담갔을 때 썩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마음이 담긴 자는 곧 썩은 자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유다와 오늘 우리들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썩은 존재라는 것은 겉으로만 보면 알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선함과 도덕이 우리의 악함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겉만 바라보는 사람은 ‘인간은 썩었다’는 말에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이방인의 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말씀이 제대로 증거되고 말씀을 제대로 듣게 된다면 ‘나는 썩었고 부패한 자일뿐입니다’라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만 된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자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썩은 띠에 지나지 않은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빌 2:11절에 보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자신이 썩은 자임을 알 때 가능합니다. 썩은 자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내 스스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도 없음을 자인하며 예수님이 나의 전부가 되시고 힘이 되시고 주가 되신다는 고백이 있을 때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높임 받으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영광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썩은 자에게 영광이 어울리기나 하겠습니까? 신자는 다만 주 만 바라봅니다. 썩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새롭게 되고 영원한 생명에 속하게 된 것으로 이미 큰 영광을 누리고 있음을 깨달았기에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늘의 영광에 소망을 둘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