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3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5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6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설교>
하나님께서 유다에 가뭄이 들게 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2절에서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고 말할 정도로 극심한 가뭄을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인도하신 땅에 가뭄이 있다는 것은 유다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무시하며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악을 행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징계입니다. 따라서 유다는 가뭄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들의 악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 같은 말씀을 들어도 자신이 악에 대해서는 전혀 무감각할 뿐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깐 것처럼 하나님이 대해 당당합니다. 그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된 예언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극심한 가뭄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평강만을 외칩니다.
1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거짓선지자들은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는 말로 유다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그들 마음을 달래주는 일에만 급급한 것입니다.
유다의 마음은 예레미야의 말보다는 거짓 선지자의 말에 더 기울어졌습니다. 재앙을 경고하는 불편한 말보다는 좋은 말 듣기를 더 선호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실상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자기의 삶에만 매진할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종교적 행위와 제사 드리는 것으로 됐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11절)고 말씀하심으로 유다가 하나님과의 관계 밖으로 멀어졌음을 시사하십니다.
사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말씀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제 한번이라도 세상보다 말씀을 더 원하고 말씀으로 산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말씀이 그런 나를 책망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옳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다보면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자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TV에서 선행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의 선행에 대해 듣기만 해도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하물이 말씀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의에 대해 증거하는데도 부끄러움을 갖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그것은 유다처럼 신자로써 할 만큼은 하고 있다는 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신자로써 할 만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유다와 다를 바 없습니다.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헌금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과 같은 종교적 행위를 근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으로 인정되었다면 유다에게 가뭄이 경고될 리가 없고 오히려 유다가 하나님의 크신 복을 누리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라고 말합니다.
가뭄이 들자 귀인들이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구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사환들이 우물에 가도 물을 얻지 못하고 빈 그릇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빈 그릇으로 돌아오는 사환들이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린다는 것입니다.
물을 구하지 못한 것은 사환들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부끄러워하고 근심하는 것일까요? 4절을 보면 농부도 비가 없어서 지면이 갈라지는 것 때문에 부끄러워합니다. 이처럼 사환이나 농부의 부끄러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환이 만약 가뭄 속에서 물을 구했다면 주인에게 칭찬들을 것을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물을 구한 자신의 공로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농부 또한 자랑거리는 풍성한 소출입니다. 그런데 가뭄은 밭을 모두 말라 갈라지게 하고 소출 역시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농부에게 소출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사환이나 농부의 부끄러움은 가뭄으로 인해서 내세울게 없게 된 자기 현실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떨 때 무엇으로 부끄러워하십니까? 우리 역시 내세울게 없고 보여줄 것이 없는 현실 때문에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보여줄 것이 없다는 것을 자신의 무능력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한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도 자신은 내세울만한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과연 우리를 진정으로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무덤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에 이끌려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에 대해 고발당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가 고발되는 것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십시오. 그가 비록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는 했지만 유다 백성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를 거부하며 핍박합니다. 인간적 마음으로 본다면 많이 외로웠을 것입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들이야 말로 바른 진리를 전하는 참된 선지자로 여김 받습니다.
이처럼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예레미야의 그 처지가 세상 시각으로 본다면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의 죄를 보고 있었고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은 잘되는데 나만 실패한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일이 뜻대로 안되고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증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도 실패도 우리를 다루시면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때문에 어려움과 실패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신자의 당당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가뭄으로 인해서 요셉이 국무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때 애굽의 바로를 만난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을 한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바로는 강하고 부요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빌붙어 살기 위해 온 거지와 같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기가 죽고 머리를 숙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오히려 바로를 축복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알게 된 참된 복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신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은총을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위로와 힘이 되심을 무시하며 세상 것을 힘으로 삼고 세상 것에서 위로 받으려는 것으로 부끄러워합니다. 이러한 부끄러움이 있다면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