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15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 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17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
18 내가 우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19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20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설교>
세상의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 역시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숨을 쉬어야 존재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 또한 하나님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존재에서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늘 하나님에 대해 못마땅해 합니다.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고 타인보다 적게 받았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존귀한 것에 대해 눈을 돌리지 않은 결과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차별적인 은혜를 베푸신 적이 없고 모든 신자에게 공평하고 가장 존귀한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과 짜증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께 나와 예배를 드린다 해도 습관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고 감사와 기쁨이 없는 형식과 의식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땅의 것으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땅의 것을 그만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됩니다. 과연 이것이 신자로써 온전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땅의 것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땅의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고방식에 합류하여 세상과 함께 합류하여 흘러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존귀한 선물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문제를 도와줄 신을 찾는 것입니다.
19,20절에 보면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가 힘이고 요새고 피난처인 것은 여호와로 인해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과 국가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사망의 존재로 존재하고 있을 뿐 생명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것으로 부요하든 세상은 사망에 속했습니다. 때문에 애당초부터 땅의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에 속한 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땅의 것으로 가난하든 부요하든 상관없이 생명에 속한 자라면 땅의 것의 많고 적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자신을 부요하게 할 우상을 섬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땅의 것이 아닌 생명을 약속 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고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자신을 배부르게 할 신을 찾습니다. 이것이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는 것이고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을 좇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돕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돕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서 말한 대로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만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의 기준에서 가치 있는 자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생존 자체가 은혜와 도우심의 본질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존에서 조차 은혜와 도우심을 보지 못한다면 생명의 문제에서 나타난 참된 은혜와 도우심 역시 보지 못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15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후에 이스라엘로부터 등을 돌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계속 약속의 땅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이방 땅으로 쫓겨 갔던 것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할 수 있는 존재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들을 이방 땅으로 쫓겨 가게 해서 거기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는 것으로 우리에 대한 모든 일을 끝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린 항상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의 욕망은 줄기차게 사탄의 유혹에 빠져 들고 싶어 합니다.
그런 우리를 다스리시고, 징계하시고, 정신 차리게 하시면서 생명으로 인도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지 않으신다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평은 육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나올 뿐입니다.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을 좇기에 불평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힘과 요새와 피난처로 우리에게 함께 하십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일이 잘되고 승승장구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력의 유혹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며 나를 구원하신 생명의 주로 바라보면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도우시는가를 알기에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생명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과 능력은 자기 백성을 악한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여 생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고, 생명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붙드시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성공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과 도우심이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나아가서 내 힘과 열심으로도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교만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과 도움이 있어서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힘이고 요새고 피난처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곧 형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잘되는 길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