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지 여러 나라 가운데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14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5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16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
17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18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19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21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22 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뜨리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23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옵시며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시고 그들을 주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께서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하니라
<설교>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말씀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뒤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곧 빛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마음에 자리한 그가 곧 어둠에서 빛으로 바뀐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그 마음에 말씀이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가는 길은 빛과 상관없이 이방인이 가는 어둠의 길과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러한 유다 형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고 말합니다. ‘레바논의 눈’은 레바논 높은 산에 쌓인 눈을 뜻합니다. 높은 산의 눈 녹은 물이 들의 바위를 떠나지 않고 늘 흐른다는 뜻입니다.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라는 말도 레바논 높은 산의 눈 녹은 물이 흘러 내려 땅속에 스며들어 저장되었다가 땅을 파면 물이 솟는 것을 찬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레바논의 눈은 녹지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존재함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유대 백성들의 마음에 레바논의 눈으로 녹아 흘러 내려서 마르지 않은 말씀으로 존재해야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습니다. 말씀이 그들 마음에 늘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말라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도 잊어버리고 허무한 것을 찾아 분향을 하게 된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절을 보면 그 가증한 일을 하나님을 잊고 허무한 것에 분향한 일로 말합니다.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은 사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우상을 섬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제사하고 경배하는 일을 포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제사했다면 어쨌든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있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닙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진노하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말씀을 그들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예배당을 찾아 예배드린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습관에 의해서 예배당을 찾은 것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이나 기쁨에 대한 관심보다는 신앙의 행위로 인해서 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자신의 기쁨, 즉 취미 생활의 수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은 허무한 것을 좇았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말한 대로 그것이 영원한 웃음거리가 됩니다. 유다가 이 같은 웃음거리가 되는 길로 가게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 무엇이 하나님 백성다운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이방인들처럼 강하고 부요한 나라로 존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부러워하는 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말씀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호소를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꾀를 내어서 자신을 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레미야를 죽여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제사장이 있고 지혜자가 있고 선지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없어도 제사를 드리고 지혜를 얻고 말씀을 듣는 일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레미야가 없어도 그들 신앙생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죽여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몰랐던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것이 그들이 제사장으로 여기고 있는 제사장, 지혜로 여기고 있는 지혜자, 선지자로 여기고 있는 선지자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제사장, 지혜자, 선지자가 있었지만 그들을 유다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보내서 유다 백성에게 참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보지 못합니다. 말씀이 그들 속에 있지 않으니 참된 말씀을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좇고 있는 허무한 것을 버리고 싶은 않은 마음에 자신들을 책망하는 예레미야를 침으로써 귀찮은 존재를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찮은 것으로, 자신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존재가 없어도 그들에게는 제사를 담당한 제사장이 있고,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서기관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도 있습니다. 예수가 없어도 그들 신앙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기에 예수님에 대해 아쉬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없으면 안된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분명 예수님이 없으면 안되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세상 것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만 있다면 된다는 생각이 있다면 돈에 대해 아쉬워 할 뿐이지 예수님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참된 복음을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잘못됨을 드러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이런 말이 듣기 싫은 것입니다.
세상은 돈 없이는 못산다고 하지만 신자는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 그런가를 알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마음에 흐르는 신자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게 되고 세상의 것을 허무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라는 증거입니다. 이런 증거가 나타나는 신자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