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19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
<설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일이나 말씀을 보면 우리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며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보다 지금 현재의 일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현재의 삶을 편하게 잘 사는 것이 관심의 전부입니다. 자연히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마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 것처럼 외면하고 있습니다. 애당초 말씀과 관계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의 마지막을 외면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삶이 어떻든 상관없이 세상 마지막의 순간에 서게 되면 모든 인간은 생명과 사망으로 나눠집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 자랑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사망이 아니라 생명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도 부요와 권력을 자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무엇이 참된 복이며 무엇이 저주인가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 때가 되면 헛된 것을 추구하고 살았던 것으로 탄식하게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마지막 때에 있게 될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그 마지막 때에 서서 현재의 삶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현재의 삶은 지나가는 것이고 마지막 때는 우리를 다가오는 것입니다. 즉 현재의 삶은 지나가는 허상이며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마지막 때가 실상인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서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현재의 삶에 복을 주기 위해서 일하실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을 마지막 때에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에 들어갈 수 없다면 현재 어떤 것을 누린다고 해도 모두 쓸데없는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생명으로 향하고 생명의 존귀하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고 인도하실 것인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 징벌 받은 에브라임, 즉 북 이스라엘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대적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것을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15절)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라마는 유다 사람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위해 집결 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라마에는 끌려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울음소리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라헬의 애곡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라헬의 자식은 요셉와 베냐민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았는데 이들은 모두 북쪽 이스라엘에 속한 지파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은 유다에 속한 두 지파 중 하나이기 때문에 라헬은 북 이스라엘과 유다의 어머니로 지칭되는 것이고, 또한 라헬은 야곱이 사랑했던 여인이기에 고통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통곡을 라헬의 애곡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 2:17-18절에서도 이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인 일을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연히 아이를 잃어버린 슬픔으로 인한 엄마의 통곡이 있었을 것이고 그 슬픔은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라헬의 애곡에 대해 하나님은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는 것 때문입니다.
네 일에 삯을 받는다는 것은 자식이 고통을 받고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애곡한 것에 대한 갚음이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라헬의 애곡에 대해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끌려간 이스라엘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작정이기에 라헬이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은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울음소리와 눈물을 멈추라고 합니다. 결국 무엇으로도 위로 될 수 없는 고통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돌아오리라’는 말씀은 비록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벌하기는 하셨지만 버리신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현재의 삶이 비록 고통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이 아니고 ‘돌아오리라’는 뜻을 가지고 일하신 것임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눈물이 멈춰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포로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게 하셔서 과거의 편안함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라면 라헬의 애곡은 무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의 의미까지 알아야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하셨으며 뜻을 세우시고 인도하셨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고통 가운데서도 울음소리와 눈물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의 치욕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욕됨입니다.
어렸을 때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나아갔던 철없던 시절을 뜻합니다. 그때의 잘못이 하나님의 백성 된 자신들에게는 치욕이며 부끄러움이었다는 알게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징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기뻐하시는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같은 사랑으로 자신의 치욕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보시면서 창자가 들끓을 정도가 되신 것이고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애곡의 자리로 밀어 넣으신 것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사랑으로 우리를 다스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사랑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고통의 현재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사랑이 위로가 되어 눈물과 슬픔이 멈추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에게 무의미한 현재는 없습니다. 모든 삶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