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0강) 하갈과 사래

by 신윤식 posted Feb 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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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설교>

 

본문은 사래와 하갈이라는 두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약속을 거듭 확인해 주셨지만 사래는 여전히 출산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는 제안을 하고 아브람은 사래의 말대로 하갈을 첩으로 받아들여 그와 동침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래가 하갈을 자기 대신 아브람에게 보내는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게 자기 임의대로 하나님의 뜻을 조작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아브람의 불신앙으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자손을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약속이 이뤄질 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면 아브람이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더 이상 출산을 기대할 수 없는 몸이 된 사래가 아닌 다른 여인을 통해서 아들을 주시고 자손을 많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계산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래가 하갈을 제안하고, 아브람이 받아들인 것은 출산할 수 없는 사래의 상황에서 사래를 통한 자손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신 하갈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인간의 열심, 또는 협력으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람도 사래도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이가 없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방법을 동원해서 약속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갈을 내세운 것은 약속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 이루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래가 아브람에게 한 말에서 드러납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하갈에게로 들어가라고 하면서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갈이 낳은 아이를 자기 아들로 간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일종의 씨받이인 셈입니다. 이처럼 사래는 자기 방법으로 아들을 얻고 약속을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의견에 동조하고 결국 하갈이 아이를 잉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브람의 가정에 분란이 발생합니다. 하갈이 아이를 잉태한 것을 빌미로 사래를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갈은 그 일로 인해 오히려 사래에게 학대를 받게 되고 사래로부터 도망치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의해 발생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고 그로 인해 이 모든 일이 발생했고 이스마엘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악과 사건부터 인간이 죄를 행하는 것을 막지 않으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개입은 항상 인간의 죄성이 드러난 후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의 죄성이 드러난 현장에서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보는 우리가 관심 두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면 하갈이 사래를 멸시하고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래와 하갈의 갈등은 사래로 인해 시작된 것입니다. 즉 사래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자의적 판단이 원인입니다.

 

 

이러한 자의적 판단은 사래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사래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거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래가 자신의 몸 강태를 보면서 아이 낳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래의 입장에서 자신의 상태를 보게 되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난 아이를 낳을 수 있어’라고 믿었어야 할까요? 그것은 어찌 생각하면 억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면 아이를 낳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이 옳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을 그러한 방향으로 끌어가지 않습니다. 즉 ‘난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만들어 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믿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래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를 초월하여 ‘하나님은 내가 아이를 낳게 하실 것을 믿는다’는 믿음을 원하셨다면 하갈을 내세우는 것을 막으시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셨어야 합니다. 하지만 언급한 대로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자의적 행동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을 두고 보셨습니다. 이유는 인간에게서 드러난 죄성을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신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이루심을 믿는 것입니다. ‘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하나님이 낳게 하신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을 포기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약속에 대한 인간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갈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몰랐기에 하갈이라는 자기 방법을 동원한 것이고 그것이 스스로를 멸시에 빠뜨리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사래가 아들이 없고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자기 상태를 보면서 하갈이라는 방법을 동원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우리가 자신의 신앙 상태를 보면서 신앙이 있는 모습으로 인정할만한 것이 없을 때 불안감을 느끼며 자기 신앙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과 생각에 따라 자기 힘으로 부족함이 없는 신앙인이 되어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래가 하갈이 아이를 낳으면 자기 아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기 방법으로 만들어 낸 의로움이 자기 것이 될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적 방법으로 낳은 아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낳은 약속의 아들만 아들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방법으로 만들어 낸 의는 의로 인정하지 않으시고 약속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의 의만 의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갈이 아이를 가진 것으로 사래를 멸시하는 것이 마치 인간의 공로 싸움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갈이 아이를 가져도 그의 신분은 사래의 종입니다. 하지만 하갈은 아이를 가진 것을 더 큰 공로를 세운 것으로 생각하고 아이를 가지지 못한 사래, 즉 공로를 세우지 못한 사래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우리의 본질을 잊고 행함을 내세우며 마치 뛰어난 신앙의 신자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래와 하갈의 갈등에서 인간의 공로와 행함이 십자가 은혜와 부딪히는 현장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공로와 행함을 보게 되면 늘 공로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바라볼 것은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의 공로와 의의 행함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