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50.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51.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52.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53.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도 보물을 주니라
54.이에 그들 곧 종과 동행자들이 먹고 마시고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55.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56.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57.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58.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59.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60.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설교>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언약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하나님께서 필히 그리고 홀로 언약대로 모든 일을 이루시고 완성시키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시고 홀로 모든 일을 이루신다면 인간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도움도 안되는 인간을 왜 존재하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이루시고 성취하신 언약의 일을 보고 믿게 하셔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심으로 영광 받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고 하나님을 믿으며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역할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자신의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기에 순종만 요구될 뿐 ‘이렇게 해 주십시오’라는 자기를 위한 자기의 뜻을 내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창 24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일에서도 인간의 뜻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종을 보내는 것부터 그러합니다.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일이라면 아브라함이든 이삭이든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직접 가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아들의 아내, 며느리를 구하는 일인데 당사자들은 뒤로 물러나고 종을 보낸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만약 종이 데려온 여인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한 것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고 하신 언약이었고,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사자를 종보다 앞서 보내실 것을 믿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며느리를 데려오는 일에까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속해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50,51절을 보면 라반과 브두엘이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고 말합니다.
라반과 브두엘은 아브라함의 종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보냄 받아 오게 되고 우물에서 리브가를 만나 자신의 집으로 오게 된 모든 일을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일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부를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고 리브가를 데리고 가서 당신의 주인의 아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두말 할 것 없이 종을 돌려보내고 이삭을 만나보자고 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아브라함이 사는 형편이나 이삭의 사람됨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겠습니까? 어느 누가 동생을, 딸을 시집보내면서 신랑 될 사람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할지라도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라반과 브두엘이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다고 한 것처럼 우리도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자신의 이익과 연결하여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에게 좋은 길, 이익이 되는 길로 인도하신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행하실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행하시는 그 일이 우리에게는 복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택하여 보내시면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의사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실 때도 인간의 의사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어떤 메시아를 보내줄까?’라고 물으셨다면 인간은 자신들을 구원할 영웅적인 인물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처럼 인간이 원하는 메시아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의사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로 인해 구원이 있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신뢰하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에 의해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는 것이고 어려움과 고통의 현실이라고 해도 자신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신뢰하고 낙심하기보다는 인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복되고 자유함이 있는 신앙생활이며 이러한 믿음으로 감사와 찬송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라반과 브두엘의 고백은 우리의 신앙의 방향이 어떠해야하는가를 알게 합니다. 현재가 나의 마음에 흡족한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곧 모든 일을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으로 바라보지 않은 불신앙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하나님에 대해 소경으로 살아갑니다. 소경이면서도 본다고 하는 교만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라반과 브두엘의 한마디 말에서 우리가 처한 믿음의 실상부터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라반과 브두엘의 고백으로 그들의 믿음을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워 그러한 고백을 하게 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에 초점을 두면 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의 위인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붙들려 사용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믿음의 고백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고 어떤 믿음의 고백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고 여러분을 사용하셔서 또 다른 자녀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은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60절에 보면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누이여’라고 말한 것을 보면 라반이 리브가를 축복하는 말로 짐작할 수 있는데 여동생을 시집보내면서 그것도 얼굴한번 보지 못한 남자에게로 보내는 상황에 어울리는 축복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라반의 축복에는 리브가가 편한 인생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은 없고 오직 하나님이 이루실 일만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라반의 축복은 창 22:17절의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라반의 축복은 리브가의 씨, 즉 여자의 후손으로 인해 원수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시는 언약의 성취를 바라보는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미 복의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모든 일이 우리를 승리 안에 있게 할 것이고 영원한 영광의 존재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고 믿으며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