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설교>
본문은 신자가 늘 암송하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인데 보시면 알겠지만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주기도문과는 그 형태가 조금 다릅니다.
먼저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동기가 마태와 누가가 서로 다른데 마태복음에서는 외식하는 자들의 잘못된 기도에 비해서 구원을 아는 신자의 기도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그 의도라고 할 것 같으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제자 중 하나가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하는 것이 그 동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 비해서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생략된 부분이 많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아버지를 호칭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아버지’로만 부르는 것으로 시작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구절이 없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구절도 빠져 있습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에서의 주기도문이 마태복음에 비해 많이 생략되어 있긴 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는 의도가 이 내용대로 기도해야 참된 기도라는 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기도문이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아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 제자의 의도 ◉
1절을 보면 제자 중 하나가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의도가 예수님께로부터 참된 기도를 배워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제자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 것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이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는 것이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고자 하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는 왜 요한이 자기 제자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을 내세워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 하는 것일까요?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라고 말한 것을 보면 당시 요한을 따르는 제자 무리가 예수님의 제자 무리와는 별도로 존재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요한도 꽤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요한을 ‘혹 그리스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외치고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 요한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착각하는 무리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눅 3:16)고 말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자신보다 능력이 많은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증거했지만 여전히 요한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의 제자들이 있었다면 이들은 하나의 세력이 되어 예수님의 제자들과 암암리에 경쟁하면서 서로 견제하는 관계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눅 5:33절의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는 말에서도 짐작되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유대 사회에서 요한의 제자와 예수님의 제자는 서로 비교되는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처럼 율법을 따르고 행동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율법에서 어긋나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비판적으로 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로서는 요한의 제자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제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지고 싶지가 않은 경쟁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에게 기도를 배웠다면 자신들보다 기도를 잘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요한의 제자들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기 싫은 마음에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9장에 보면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 안에서도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변론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쟁심을 생각해 보면 요한의 제자들보다 기도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 것으로 생각해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제자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이 기도문을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시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에게 지면 안 된다는 마음이 앞서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보다는 더 낫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서도 늘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도 누군가를 경쟁상대로 삼으며 지기 싫어하고 더 낫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온전한 모습은 아니며 세상에 보냄 받은 제자로서 바른 생각도 아닙니다.
◉ 거룩한 이름 ◉
그러면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무엇을 보게 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도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이 기도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기도문이 의미하는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기도를 하십니까? 사실 한국교회에서 주의 기도는 주문처럼 암송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주의 기도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빨리 예배 마치고 돌아가자는 마음만 앞선 채 머리에 담고 외우는 것이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거룩히 여김 받을 이름은 오직 아버지의 이름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거룩히 여김 받을 이름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어떤 사람의 행적과 업적을 내세워서 그 이름을 높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죄인의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의 행적과 업적을 가지고 자신의 죄를 지울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늘 저주 받을 자의 이름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 이름이 높임 받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더 나은 자가 되고 싶어 하고 내가 더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결국 기도에 있어서 요한의 제자보다 더 나은 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들 관심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형태를 봐도 신앙이 경쟁으로 흘러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자기의 신앙 좋음을 보여주고 과시하는데 열심입니다. 교회 일에 참여 하는 것도 결국 자기 이름이 높임 받기 위한 의도인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와 교회가 경쟁하고 구역과 구역이 경쟁하며 자기의 나음을 보여주고 이기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같은 경쟁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과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면 무엇보다 자신의 죄인 됨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고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아버지 앞에서 죄인 됨을 고백하며 나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선하시고 자비하신 일로 높이고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선하시고 자비하신 일로 높인다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 앞에 자신이 행한 일은 그 어떤 것도 자랑할 가치가 없음을 잊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안다면 누군가보다 나아지고 잘하기 위해서 기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낮음과 가치 없음을 인식하는 자리가 기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 ◉
그러므로 자기 이름의 높아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잘돼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달라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이름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세상에 속한 이방인의 기도일 뿐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부르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구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에 대해 분명한 구별을 두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나중에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의 의미로만 생각한다면 현재는 세상에 속한 자로 살다가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복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에서도 재물을 복으로 간주할까요? 세상에서의 성공을 복이라고 할까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의 높아짐도 성공도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상에 오셔서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순종과 희생만이 가장 가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서 신자가 할 일은 예수님의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나라에 속한 자로 세상에 머물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 구별을 두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요한의 제자들과 경쟁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게 하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속한 나라는 세상과 다름을 알게 하시고, 기도를 배우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나라에 합당하지 않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의 관계 ◉
그리고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기도에서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라는 관계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을 우리라는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로 바라봅니다. 나와 너의 관계로 바라보기 때문에 더 낫고 잘해야 한다는 경쟁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라는 관계 안에서는 경쟁과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경쟁과 높고 낮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차별과 구분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라는 관계를 쉽게 생각합니다. 같은 교회에 출석하면 우리가 되고, 같은 교단에 소속되면 우리가 되고, 같은 종교를 가지면 우리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같은 교회로 모이면서도 우리의 관계에 있지 못합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부패한 인간의 습성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하셨을 때 아담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며 하와에게 책임 전가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진 우리의 관계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하와를 나와 너의 관계에서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책임 없음을 위해 하와의 죄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나와 너의 관계에서 사람을 대합니다, 비록 같은 교회로 출석하고 있다고 해도 서로를 나와 너의 관계에서 만나고 대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 안의 관계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창 1:26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라는 관계는 이처럼 하나님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도, 처음 창조된 인간을 하나님이 말씀한 우리의 관계에 참여하게 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우리의 관계가 깨어지고 인간 또한 나와 너라는 독립적 관계에서 서로 경쟁하고 미워하는 관계로 전락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심은 바로 깨어진 이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친히 화목 제물 되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으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와 너’로 깨어진 관계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관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할 도구로 세워진 것이 교회이며 신자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우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같은 용서를 받았고, 같은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고 서로 경쟁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우리’라는 관계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서로에게 주어진 것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서로 많고 적음을 비교하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며 다만 주를 위해 살고자 할 뿐이기 때문에 자랑하는 것도 시기하는 것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우리의 관계로 부름 받아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기도의 의미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기도를 하면서 부끄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는 주의 기도를 할 자격이 없음을 주의 기도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용서 아래 있기 때문에 주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관계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같은 믿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피로 이루신 ‘우리’라는 복된 관계로 함께 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고 우리라는 이 관계를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