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9 내가 보니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데 이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고 저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으며 그 바퀴 모양은 황옥 같으며
10 그 모양은 넷이 꼭 같은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11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사방으로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나아가되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나아가며
12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13 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부르며
14 그룹들에게는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째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
15 그룹들이 올라가니 그들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생물이라
16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바퀴도 그 곁에서 나아가고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땅에서 올라가려 할 때에도 바퀴가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17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올라가면 이들도 함께 올라가니 이는 생물의 영이 바퀴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18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19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20 그것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래에 있던 생물이라 그들이 그룹인 줄을 내가 아니라
21 각기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으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형상이 있으니
22 그 얼굴의 형상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얼굴이며 그 모양과 그 몸도 그러하며 각기 곧게 앞으로 가더라
<설교>
신자는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일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별다른 느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다면 신자에게 하루하루의 삶은 하나님께서 일하신 덕분에 주어지고 누리는 것들로 다가와져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수고하고 일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감사는커녕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느낌조차 없이 불평과 염려와 걱정 속에 살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오해에서 찾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 현실과 연결하여 생각합니다. 자신이 목표하고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이 성사되고 타인에게는 없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것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증거를 찾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이 원한 대로 되지 않기에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느낌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참된 의미는 모든 것을 우리의 목표와 계획과는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할 때 대개의 사람들은 ‘아멘’으로 응답하기보다는 막막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신다면 인간은 어떤 계획도 세우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라는 불만으로 반응합니다. 그런 불만이 있다면 저는 그 분들에게 ‘당신은 도대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에서 사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문제는 남들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존재가 되게 하시고, 어떤 복의 세계로 인도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소경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믿음은 위선이며 가면을 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이 위선과 가면을 벗겨 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위선과 가면과 벗겨지고 추한 민낯이 드러나면서 비로소 나 같은 자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알게 됨으로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하나님의 일하심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할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등장하는 그룹과 바퀴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룹과 바퀴는 15절에서 “그들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생물이라”고 말한 것처럼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셨을 때 나타난 존재입니다. 1장에서는 네 생물로 등장하지만 그 생물이 그룹, 즉 천사였음을 본문이 말해줍니다.
에스겔은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 것을 보는데 바퀴의 모양은 황옥 같고 그 모양은 넷이 꼭 같으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9,10절). 이것은 에스겔이 처음에 본 바퀴의 모양, 구조와 같습니다(겔 1:16). 또한 11절을 보면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사방으로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나아가되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나아가며”라고 말합니다. 이 역시 1:17절에서 “그들이 갈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가며”라고 말하는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1장에서는 네 생물이 한 방향으로 나아감을 말하지만 본문에서는 그 방향을 머리 향한 곳으로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다릅니다. 네 생물이 사방으로 몸을 돌려 나아갈 수 있지만 한 방향으로, 즉 머리 향한 곳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머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절에서 그룹들 머리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 것 같더라고 말한 것들을 보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종으로 각자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동일한 방향과 목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12절에서는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고 말합니다. 1:18절에서는 바퀴들에게만 눈이 있는 것으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그룹들의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 그리고 바퀴의 둘레에까지 눈이 가득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으로 모든 것을 살피시고 천사들을 동원하여 그 뜻대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살피시고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간단히 ‘하나님이 살피시고 일하신다’라고 말하면 될 것을 굳이 그룹과 바퀴들을 동원하여 보여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살피시고 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의 내용대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원하고 계획한 일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기다리지 못한 아브람이 사래의 조언을 따라 하갈이라는 여인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에 우상을 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자신들의 일을 잘 되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고통과 위기에 직면했고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설사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고정적 앎일 뿐 실제적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또 다른 신을 필요로 한 것입니다. 자신들을 위해서 일해 줄 신을 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게 그룹과 바퀴들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지 말씀만이 아니라 그룹과 바퀴의 실제를 보여줌으로 이스라엘에게 천사들을 보내어 일하고 계셨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삶의 형편이 원하는 대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일하심을 믿지 못했던 것이고 그 결과 스스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성전에 우상을 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분노와 함께 재앙을 받게 된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셨고 천사들을 동원하여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왜 이스라엘의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면 천사를 동원하여 바벨론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고통에서 건지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생각이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사람들은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마 27:49절에서는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고 하였고, 눅 23:35절에서도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라는 말로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하나님이 두고 보시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은 신의 존재와 활동을 현실에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역시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듣고 배워온 지식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일 뿐 현실에서의 삶은 나의 계획과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여러분의 현실에서 확인하고자 하신다면 여러분이 얻게 되는 것은 막막함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에게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고 지시합니다(2절). 7절에서는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불을 집어 베 옷 입은 자의 손에 주었다고 하고, 8절에서는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나더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베옷 입은 사람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스스로 불을 집어 간 것이 아니라 그룹 사이에서 나타난 손이 집어 준 불을 가지고 갔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을 성읍 위에 흩음으로 인해서 성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이스라엘의 성전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위해 성전에서 행하고 힘썼던 모든 노력이 이스라엘에게 득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알아야 했던 것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존재일 뿐이며, 자신들의 어떤 노력과 행함으로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만을 바랄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 일하셨던 것입니다. 바벨론을 동원하신 것도, 이스라엘로 하여금 고통과 환난을 겪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이스라엘 되게 하시고 그 은혜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감사하는 참된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복을 받고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성전을 허락하신 이유가 아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성전에서 떠나시고 성전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한 존재가 복을 추구하는 것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면 오늘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도 같은 방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에스겔의 환상을 오늘 우리에게 펼쳐 주신 이유라고 할 것입니다.
그룹들은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나아가며 바퀴 역시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같이 나아갑니다. 이것을 17절에서는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올라가면 이들도 함께 올라가니 이는 생물의 영이 바퀴 가운데에 있음이더라”고 말합니다.
생물의 영이 바퀴 가운데 있음으로 바퀴가 생물, 즉 천사와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머리를 향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 신자는 자기의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를 이러한 백성으로 세우시는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막막하게만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하심의 방향을 자신의 몸으로 향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죄인 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현실을 만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감사함이 사라지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며 사도 바울처럼 어떤 형편에도 자족하기를 배우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천에 처해도 풍부에 처해도 그리스도의 은혜가 배부름이 되는 삶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평강,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비전, 목적, 계획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에 기반을 둔 신앙 역시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꾸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내 몸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의 길로 가도록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분명하게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