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4강) 성소가 되리라

by 신윤식 posted Apr 1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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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1:14-21http://onlycross.net/videos/eze/eze-11142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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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4.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5.인자야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16.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17.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18.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

19.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1.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본문>

 

에스겔은 주의 영에 의해 성전 동문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스물다섯 명의 고관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불의를 품고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로 말씀하셨는데, 그들의 불의와 악한 꾀가 무엇인지는 15절의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고관들은 당시 수많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을 때 예루살렘 성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특별히 자신들을 보호하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반면에 바벨론으로 끌려간 백성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으로 간주하며 유다 땅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기업으로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구분과 판단으로 사람과 사람을 차별하는 그것을 불의를 품고 악한 꾀를 꾸미는 것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이들에 의해서 힘없는 약자들이 박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 눈에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고 버림받은 자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죽여 그 거리를 시체로 채웠도다”(6절)는 말씀으로 드러내십니다. 결국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들이 하나님께 가까운 자들이고 그 증거를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안전한 가마 같은 예루살렘 성에 남아 있게 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칼을 보내 심판해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에스겔이 예언할 때 동문에서 본 고관 중의 한 사람인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에스겔은 블라댜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마저 심판에 의해 진멸 될 것으로 생각하고 13절에서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라고 부르짖습니다. 아마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백성들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표면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이 남은 자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백성들은 언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있었기에 희망을 둘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마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면 결국 예루살렘에는 남은 자가 전혀 없는 상태가 되기에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있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포로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부르짖음에 대한 답으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내용인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의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을 떠나 이방 나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기 때문에 15절의 말처럼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난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 나라로 흩어진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여러 이방 나라로 흩어졌다 해도 그들에겐 여전히 성소가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인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여러 이방 나라로 흩으신 그들에게 성소가 되신다는 것은 참된 성소는 어느 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예루살렘 성전처럼 눈에 보이는 건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성전은 참된 성전이 아니며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도 그들만의 생각일 뿐 하나님의 생각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마 2장에 보면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을 때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유대인을 다스리는 헤롯왕이 있었고 로마에 의해 유대의 왕이 세워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언급하는 것은 헤롯왕은 유대인의 왕이 아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에 의해 세워지는 왕이 참된 왕이 아님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내시고 세우신 그가 참된 왕이시라는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 성전과 성소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이방나라로 흩어진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성소가 되신다는 것이야 말로 예루살렘의 성전이 성전이 아님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성전과, 그 성전에서 행하는 제사를 하나님의 백성 된 증표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방나라로 흩으신 백성들의 편이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7절을 보면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고 말씀하지만 하나님이 모으실 백성은 흩어진 모든 자들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19,20절을 보면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한 마음을 주신다는 것은 일치된 마음, 즉 동일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가 동일한 마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말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인 우리 역시 모두가 일치된 동일한 마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마음을 주시기 위해 여러 이방나라로 흩으신 것입니다.

 

 

여러 이방 나라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는 모두가 동일합니다. 오랫동안 살아오던 나라에서 쫓겨나 이방나라로 흩어진 채 온갖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으로 지내던 것과 같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온 백성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는 왕, 귀족, 평민, 종 등의 여러 신분으로 나뉘어 차별적인 대우가 있었다 해도 바벨론에서는 단지 포로의 신분일 뿐입니다.

 

 

왕도 백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있습니다. 따라서 동일한 마음이라는 것은 자신이 처한 포로라는 비참한 처지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뿐 자신의 우월함을 내세울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한 마음, 일치된 마음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신자에게 주신 한 마음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고관들은 포로가 되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이방나라로 흩어진 사람들과는 다르게 여겼고 그것으로 자신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같은 마음을 불의한 것으로 규정하셨고, 19절에서 말한 것처럼 돌 같은 마음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소가 되리라’는 말씀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소가 되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성소가 되신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고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성소는 예루살렘의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곳 성전에 계신 분이었지 하나님이 친히 성소가 되어주신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제사 드린 것 역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내겠다는 의도인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는 각자 자신을 위한 행복과 안위만 있을 뿐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생각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벨론에 끌려온 백성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소망했겠습니까? 당연히 그들의 성전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소망이며 간절한 염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벨론에 있는 그들에게 성소가 되신다면 예루살렘의 성전에 목을 멜 이유가 없습니다. 바벨론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그들에게 성소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비록 성전에서의 제사가 없고 포로로 끌려온 비참한 처지에 있다 해도 그 모든 것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성소로 함께 하신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성소는 죄 없는 제물이 죄로 가득한 인간에 의해 희생되는 곳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성소가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로 가득한 인간을 구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며 이 언약의 성취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참된 성소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고초를 겪고 있던 백성들은 하나님이 성소가 되어주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뻐할까요? 예루살렘 성전에 마음을 두고 돌아가서 예전과 같은 평안의 삶을 누리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었다면 하나님이 성소가 되어주신다는 말이 기쁨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성소가 되어주지 않으시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례를 따를 수 없고 규례를 지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고 규례를 지켜 행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런데 율례를 따르고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새 영을 주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율례를 따르고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은 나의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의 희생을 마음에 품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례와 규례가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은 우리가 진노의 자식이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원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감지하지 못하면 항상 자신의 의를 내세우며 타인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나타내고 차별하게 됩니다. 이것이 돌 같은 마음입니다.

 

 

현대 교회도 보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앙 좋은 사람에게 복 주시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응답하시며 어려움에서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목사와 교인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함께 하면서 설교하고 설교를 듣습니다. 어떤 내용의 말들이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할지는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열심을 나타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월이고 차별이며 경쟁입니다. 복을 받은 정도의 차이로 신앙의 정도가 나눠질 것이고 많이 가진 자는 그만큼 복을 많이 받은 것으로 자랑되며 결국 누가 잘하는지 서로 비교하고 잘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낼 뿐입니다. 이것이 돌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의 모임에서 나타나는 악함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남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포로 된 백성들과 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보지 못한 채 우월감에 빠진 돌 같은 마음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환경의 차이를 두고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고 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편한 삶으로 인해 자신의 돌 같은 마음을 보지 못할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환경의 차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스물다섯명의 고관들에게는 이방나라에 포로된 것이 하나님께 미움 받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으로 보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유익입니다. 하나님께 미움 받는 것 같은 처지에 있을 때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신이야 말로 하나님께 미움 받을 수밖에 없음을 직시할 때 우리의 성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희생을 마음에 품을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환경의 차이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버림받으신 것은 저 때문이고 여러분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으로 만나게 됩니다. 교회로 모이면서 다른 모든 것은 잘라지고 오직 예수님을 못 박은 죄인이라는 사실만 마음에 품고 함께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한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전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우리가 성전으로 여김 받게 됩니다.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 인간의 공로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드러운 마음을 지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임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이 축복이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