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7강) 하나님의 수수께끼

by 신윤식 posted Jul 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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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7:1-10http://onlycross.net/videos/eze/eze-17011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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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와 비유를 말하라

3.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꺾되

4.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인의 성읍에 두고

5.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6.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 아래에 있었더라

7.또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에게 물을 받으려고 그 심어진 두둑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뻗고 가지가 퍼졌도다

8.그 포도나무를 큰 물 가 옥토에 심은 것은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이루게 하려 하였음이라

9.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 나무가 능히 번성하겠느냐 이 독수리가 어찌 그 뿌리를 빼고 열매를 따며 그 나무가 시들게 하지 아니하겠으며 그 연한 잎사귀가 마르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많은 백성이나 강한 팔이 아니라도 그 뿌리를 뽑으리라

10.볼지어다 그것이 심어졌으나 번성하겠느냐 동풍에 부딪힐 때에 아주 마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자라던 두둑에서 마르리라 하셨다 하라

 


<설교>

 

본문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주신 하나님의 수수께끼와 비유입니다. 수수께끼는 ‘어떤 사물에 대하여 바로 말하지 않고 빗대어서 말하여 그 사물의 뜻이나 이름을 맞추는 놀이’로 설명됩니다. 그리고 비유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수수께끼와 비유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의미의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수께끼가 비유고 비유가 곧 수수께끼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처럼 수수께끼와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마 10:10절에 보면 제자들이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0:13절)고 말씀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비밀의 말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수수께끼와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담아 주시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 풀 수 없는 내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담긴 수수께끼와 비유를 인간이 쉽게 풀어 버린다면 수수께끼를 푼 인간이 수수께끼를 낸 하나님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인간이 풀 수 없는 이유는 비밀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인간의 사고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인간에게 납득될 수 없는 비밀의 속성으로 진행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은 인간의 사고로는 인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만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에 인간은 철저히 배제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에 전혀 쓸모없는 존재일 뿐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며 이것이 인간에게 비밀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인간으로는 납득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비밀을 하나님이 택한 자녀에게만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에게만 성령이 임하게 하셔서 비밀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에 들어가 구원의 비밀을 알게 되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비밀인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된 것으로 감사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수수께끼와 비유는 비밀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수께끼와 비유로 말씀되어진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인간이 미리 알거나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수수께끼와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스라엘이 미리 알거나 대처하지 못하고 그대로 되어질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를 본문의 수수께끼와 비유의 내용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의 수수께끼, 즉 비유가 있습니다. 큰 두 독수리와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그리고 11절부터 21절까지는 비유에 대한 해석입니다. 3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꺾되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인의 성읍에 두고”라는 말씀에서 큰 독수리는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는 12절에서 “너는 반역하는 족속에게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 가고”라고 말씀한 것처럼 바벨론이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야긴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어간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5-6절의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 아래에 있었더라”는 비유는 13절의 “그 왕족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언약을 세우고 그에게 맹세하게 하고 또 그 땅의 능한 자들을 옮겨 갔나니”는 말씀처럼 바벨론이 여호야긴 왕 대신에 시드기야를 세워 바벨론과 언약을 맺게 하여 왕으로 삼은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큰 독수리 하나가 더 등장하는데 이는 15절을 보면 애굽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에게 물을 받으려고 그 심어진 두둑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뻗고 가지가 퍼졌도다”(7절)라고 말한 것은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과 세운 언약을 배반하고 애굽의 도움을 받아 바벨론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중심 내용은 바벨론과 세운 언약을 배반하고 애굽의 도움을 받아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사절을 애굽에 보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15절)입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과의 언약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할 수 없고 바벨론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언약을 배반하고”라는 말은 16절, 18절, 19절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수수께끼와 비유의 중심 내용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배반한 일을 담고 있으며 바벨론 왕과 세운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함으로 인해 결국 바벨론에서 죽게 된다면 하물며 하나님과의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한 일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19절의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맹세를 업신여기고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내용만 보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심판으로 끝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시드기야가 바벨론과의 언약을 배반한 결과를 그가 바벨론에서 죽는 것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맹세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은 죽음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겔 16:59절에서도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벨론도 시드기야가 자신들과의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한 것에 대해 용납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시드기야를 사로잡고 그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왕하 25:7).

 

 

바벨론 왕의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한 결과가 이 정도라면 하나님의 맹세를 업신여기고 언약을 배반한 결과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바벨론에 끌려와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자신들의 죽음을 실감해야 했던 것입니다.

 

 

지난주의 말씀대로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겔 16:60)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맹세를 업신여기고 언약을 배반하였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맹세대로, 그리고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에게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이루심으로 인해서 심판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두고만 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무너지는 것을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무너짐을 통해서 자신들이 심판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심판을 알아야 하나님의 구원이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수수께끼와 비유에 담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문자대로 해석하자면 우리를 재앙에서 건져 주시고 죄로부터 구하여 멸망이 아닌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이런 의미로 이해하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종교적 사고일 뿐입니다. 모든 종교의 중심에는 자기 구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신을 찾고 교훈과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종교와 다릅니다. 본문의 수수께끼와 비유가 말해주고 있는 것은 인간은 언약을 배반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만이 언약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맹세를 업신여기고 언약을 배반한 채 자기 나름대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세상의 힘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럼에도 구원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언약을 완성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인 신자는 자기 구원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완성하신 하나님께 온 마음을 두게 되면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이 인간에게는 납득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구원을 위해 행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행한 일을 보시고 복을 주시며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비밀인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안다고 하는 분들은 구원의 조건이 인간의 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며 자신 역시 자기 행함을 보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해서 자신이 바른 믿음 위에 있다고 간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늘 자기 행함을 바라보며 행함과 행함의 비교하는 습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면서 자신의 존재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고 바벨론으로 끌려와 포로로 생활하면서도 자신들이 왜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때문에 관심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고통에서 건져 주시는 것이 전부였을 뿐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맹세를 업신여겼다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알지 못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자신들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마치 지금의 한국교회의 형편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맹세, 언약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교회 부흥을 위해 힘쓰고 전도와 선교 등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하는 자신들이야 말로 참된 교회고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일하는데 정작 교회는 부흥되지 않고 신자의 생활 또한 힘들다면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했는데 왜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까?’라는 불평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목사가 복음만 힘써 전했는데 교인수가 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복음만 전하면 하나님께서 복음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내 교회로 보내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맹세대로 언약을 완성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에게 마음을 두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인간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의 맹세를 업신여기고 언약을 배반한 자로 살아갑니다. 자기 현실에 매몰 된 채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현실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지금의 현실이 자신이 원한 대로 바뀌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자기 죽음입니다. 그리고 자기 죽음에서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을 완성하심으로 구원이 우리의 현실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형편에 그냥 두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인 구원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신자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