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8강) 높은 나무를 낮추고

by 신윤식 posted Jul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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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7:22-24http://onlycross.net/videos/eze/eze-17222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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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24.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설교>

 

신자가 기도할 때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진심으로 하나님이 좋아서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지 의문이 앞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좋으십니까? 하나님이 좋으시다면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죄에서 건져 주시고 용서하시고 거룩한 자녀로 삼아주시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까? 분명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 알고 감사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고 그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고 계신 그 뜻과 계획도 반드시 이루실 것이며 그 모든 것이 분명 우리에게 좋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도 믿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라면 모든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 옳은데 우린 늘 불만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현실의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이해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불만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현실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셨으면 하는 바램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우리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우려하고 피했으면 하는 일들이 주어지는 경우를 수없이 겪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신자라면 누구나 겪는 신앙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이 원하는 현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소연이 담긴 기도로 끝날 뿐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남는 것은 바뀌지 않은 매일의 현실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 동일하게 염려와 걱정으로 산 것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항복하지 못하고 자기의 뜻을 요구할 뿐이며 뜻대로 되지 않기에 불만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온 인생을 걸고 하나님을 놓을 수 없다는 각오라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절대로 여러분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낙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지 못한 무지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는 것입니다. 또한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높아지고 무성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오직 높아지고 무성해지는 쪽으로 향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은 시작부터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방향과는 어긋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높아짐과 무성함을 위해 하나님을 부른다면 하나님이 응답할리 만무합니다.

 

 

혹 낮은 나무를 높이시는 하나님이시니까 ‘내가 낮아지면 높아지게 하시고 마른 나무가 되면 무성하게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낮아지고 마른 나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높아지기 위해 낮아지고자 하는 생각이 있다면 이미 높은 나무인 것이고 사람은 누구도 자기 본성을 거스르는 길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높은 나무를 낮아지게 하시고 푸른 나무는 마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해 자기 현실에서 불만과 불평을 일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높은 나무를 낮아지게 하시고 푸른 나무를 마르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높은 나무, 푸른 나무를 싫어하신다는 뜻인데 무엇 때문에 낮은 나무를 높이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또한 낮은 나무를 높이셨다면 낮은 나무가 높은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이신 나무를 또 다시 낮추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점에서 본문은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24절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높음과 무성함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높음, 무성함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자기 백성을 높아지게 하시고 무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높음과 무성함이 아닙니다. 인간은 세상 속에서 높아지고 무성해지는 것을 원합니다. 낮은 사람들 속에서 높아지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즉 낮은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는 높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추구하는 높음, 무성함은 모두 힘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높이며 무성하게 하시는 것은 세상의 힘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낮추신 모든 낮은 나무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높이신 나무의 세계에서는 높은 나무 낮은 나무의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한 것에 대해 추궁하셨습니다. 20절에서는 하나님을 반역한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힘 있는 나라인 바벨론과 애굽을 의지한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과 애굽을 의지했는데 그 이유는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도 높아지고 무성한 나라가 되고 싶었던 것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꺾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수수께끼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현실이 이해되지 않고 납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어진 현실은 마치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아서 비명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각에 의한 일하심의 방법이고 방향이라는 것을 24절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나무를 낮추고 푸른 나무를 말리는 작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높이고 무성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높이는 모든 일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게 될 것이고 어떤 어려움의 현실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고 인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 새롭게 된 신자임을 생각해 본다면 교회마다 신자로 자처하고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이 중심이 되고 자기를 위해 행하는 종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2,23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맹세를 업신여기고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겠다는 것인지 이 구절만 보면 여전히 수수께끼와 비유로만 들립니다. 그럼에도 수수께끼와 비유와 같은 이 말씀에 한 가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의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참된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지 우리가 몸으로 살아가는 현재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현재는 다만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말씀으로 알게 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에게 일하고 계심을 현재의 삶에서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세상에 소망을 두게 되는 것이 참된 현실을 사는 것입니다.

 

 

백향목 꼭대기는 다윗 왕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신다고 하시는데 다윗 왕조에서 높은 가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윗 왕조에서 높은 가지는 왕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영원한 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 즉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심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한 연한 가지는 약한 가지입니다. 약한 가지가 누구겠습니까?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라는 말로 묘사되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왕으로 오시지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멸시 받는 보잘 것 없는 약한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세계는 세상의 힘, 즉 높음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힘과는 무관한 길로 가면서 하나님의 백성 됨을 드러낼 존재로 부름 받았지만 바벨론과 애굽을 의지함으로 언약을 배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수께끼와 비유에는 하나님이 이루실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3절,4절에 보면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꺾되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인의 성읍에 두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낮아지게 하셔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까지 하신 것을 말하는 데 23절에서도 역시 높은 가지를 꺾고 연한 가지를 꺾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도 높음을 자랑하는 존재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꺾임을 당해야 하지만 그 길을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담당하시고 가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 나무가 능히 번성하겠느냐 이 독수리가 어찌 그 뿌리를 빼고 열매를 따며 그 나무가 시들게 하지 아니하겠으며 그 연한 잎사귀가 마르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많은 백성이나 강한 팔이 아니라도 그 뿌리를 뽑으리라”고 말씀하는데 23절에서는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번성 대신에 하나님이 심으신 연한 가지로 말미암은 번성과 무성함을 이루어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들에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과 애굽과 같은 힘의 그늘 아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는 볼품없는 연한 가지의 그늘 아래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 13:19)의 비유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말씀들을 모아 보면 하나님이 증거 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로 하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낮춰지고 말라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이 높은 나무였고 푸른 나무였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러한 자신들을 낮추고 말라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낮추고 말라지게 하신 자신들을 높이며 무성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신자의 높음과 무성함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땅의 것으로 높아지고 무성해지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곧 자신의 높음이 되고 무성함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높음이 되고 무성함이 되는 그 세계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이 어떤 생각과 뜻으로 일하시는가를 알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안다면 이스라엘처럼 땅의 것으로 높아지고 무성하게 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높은 나무 되고 푸른 나무 되는 것에 기대를 두고 삽니다. 겉으로는 복음을 말해도 속에는 높음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욕망을 꺾으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부서지고 무너져야 할 그 길을 그리스도가 가셨음을 보게 하시면서 그리스도께 모든 소망을 두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높음과 무성함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우리를 이것을 아는 자 되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뜻과 일치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모든 현실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