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46강) 성소를 향한 칼

by 신윤식 posted Sep 19,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겔 21:1-7http://onlycross.net/videos/eze/eze-21010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성소를 향하여 소리내어 이스라엘 땅에게 예언하라

3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4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5 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6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7 그들이 네게 묻기를 네가 어찌하여 탄식하느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재앙이 다가온다는 소문 때문이니 각 마음이 녹으며 모든 손이 약하여지며 각 영이 쇠하며 모든 무릎이 물과 같이 약해지리라 보라 재앙이 오나니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설교>

구약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죄와 심판에 대한 이야기들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인간의 과거 죄에 대한 기록임과 동시에 그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 인간의 죄와 심판에 대한 내용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와 같은 죄를 범하지 말자’는 각성의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요?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은 과거의 인간과 지금의 우리가 다르고 그들의 죄를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죄를 범하지 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변함없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과거의 인간이나 오늘 우리들이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거 인간들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현대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 역시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고 믿음의 길로만 가고 있는 것처럼 심판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죄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심판을 대신 짊어지신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벗어나서는 믿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서에서도 하나님은 계속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웃집 불구경 하듯 봐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이야기는 오늘 우리를 죄의 자리로 밀어 넣으시고 심판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간과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부활이 죽음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 없이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죄와 심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붙들어 놓기 위함인 것입니다.

 

 

에스겔 21장에는 칼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칼을 말하면서 여호와가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어 버리고 모든 육체를 남과 북까지 치겠다고 말합니다(3,4절). 칼로 치겠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5절)고 말씀한 것처럼 한번 뺀 여호와의 칼은 다시 칼집에 꽂히지 않습니다. 심판이 취소되거나 중지되는 일 없이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엄중하고 중지되지 않은 심판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살았다고 할 자가 있겠습니까? 누구도 없습니다. 모두가 죽었다는 것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을 통해 드러내시는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2절을 보시면 “인자야 너는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성소를 향하여 소리내어 이스라엘 땅에게 예언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은 거룩한 땅이며 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시는 영광의 장소이기에 그들에게는 신앙의 중심지이고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그곳으로 항하여 소리 내어 예언하라는 것입니다.

 

 

예언의 내용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여호와의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이스라엘에게서 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심판의 칼이 가장 먼저 다른 곳이 아닌 예루살렘의 성소를 향해 있는 것입니다.

 

 

심판의 칼이 왜 먼저 예루살렘 성소를 향할까요? 성소는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소는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시는 영광의 곳이기 때문에 성소를 향한 이스라엘의 열심과 정성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칼이 성소를 향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과 신앙의 행위 모든 것이 죄라는 결론이 됩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먼저 우상으로 더러워진 성소로 여호와의 칼이 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상에 대해 수없이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히 성전에 이방의 신을 들여 놓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그들의 생각이 이방인이 우상을 신앙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행하는 모든 것을 신앙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신앙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악을 쌓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14,15절을 보면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고 말합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성경이 말하는 죄와 심판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심판으로 끌어가기 위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이는 여호와의 칼이 성소를 향하고 모든 성문을 향해 세워 놓았다면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신앙은 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영광의 장소로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방인으로부터 보호 받으며 복을 누리고 평안한 삶을 누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즉 자신들을 살리는 성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소는 이스라엘을 죽이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성소를 통해서 ‘우리는 죽은 자다’로 바라보는 것이 성소에 의한 바른 자기 해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고 말씀하겠습니까? 칼집에서 뺀 여호와의 칼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4절에서 말한 것처럼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20:47절에서 “남쪽의 숲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의 가운데에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없애리니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이 그슬릴지라”고 말씀한 것과도 같습니다.

 

 

이상한 것은 왜 의인이 악인과 함께 여호와의 칼을 받아야 하는가 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여호와의 칼이 향할 곳은 악인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여호와의 칼이 피해가고 오히려 의에 대한 보상으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찾고 또한 각기 나름대로 신을 만들어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있는 공통적인 바램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끊는다면 의인이라 해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의인 되었으니까 난 이제 죽음과 심판에서 벗어났고 복을 받아 잘 살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무엇이 의인인가를 모르는 것이 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벗고 의인으로 여김 받게 된 것이 사실이고 심판에서 건짐 받고 구원되었으며 죽은 자가 아닌 생명에 속한 산 자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여호와의 칼이 우리를 향해 있는 죽음의 자리에서 베풀어진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의인 되었다는 것을 이젠 죽음, 심판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는 결과에만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죽음과 심판에서 건지시고 의로운 자로 여김 받게 하신 것은 도무지 의로운 자 될 수 없는 우리가 의롭게 된 원인을 세상에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의인 될 수 없는 자를 의인되게 하신 그 원인과 결과가 담긴 것이 바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의인되게 한 원인과 결과에만 초점을 두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의인되게 했고 심판에서 건짐 받았다’는 것만 있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에만 초점을 두게 되면 점차 죄인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리게 됩니다. 의인 되었고 구원 받았는데 왜 계속 죄인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죽음에 있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생명에 있게 하신, 즉 원인과 결과를 일으키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과 열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의인되었거나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열심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의인은 늘 자신의 죽음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열심에 그 마음에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진심으로 복음을 알고 의인됨을 아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성소가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열심을 보기보다는 성소가 존재하는 이스라엘을 생각했고 성소를 찾는 자신들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잘못인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구원은 확정되었다는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의 의미를 여러분 자신의 구원과 연결하여 생각한다면 ‘구원이 확정되었으니 어떻게 살아도 구원 되겠네’라는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구원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결과를 안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확정된 결과는 여러분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확정하신 결과의 그 자리로 우리를 데려다 놓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나 같은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끌어가시는 은혜와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죄인이라는 말이 듣기 싫습니까? 그렇다면 아직까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바라본다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조차도 자신의 의로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죄의 모습을 간파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자신이 은혜 아래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남게 되는 것은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소를 향해 칼을 빼셨다면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성소는 성소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겔 11:16절에 보면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잠깐 이스라엘에게 성소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온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성소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소가 되어주시겠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소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함께 해주심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성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지금 그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 아래 있는 것이 행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겔 37:26-28절에 보면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성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칼로 치시고 대신 하나님의 성소를 그들 가운데 있게 하시고 성소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는 어느 지역에 고정되어 있어서 성소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 아래 있는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성소가 되어 주심으로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을 거룩한 자로 여김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소로 오셔서 우리를 거룩한 자 되게 하실 것에 대한 내용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칼이 성소를 향해 있다는 말씀 앞에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내 놓을 수 있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신앙 행동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성소에서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신앙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우리보다 훨씬 수준 높게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향해 칼을 빼어 드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도 여호와의 칼 아래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성소에서 은혜를 받고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성소에서의 열심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시는 성소는 우리의 열심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무엇을 보지도 않으시고 처음부터 용서라는 은혜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이 성소에 우리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존재로 나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칼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칼을 빼어 드시고 우리를 대적하시는데 피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모두가 죽은 자일뿐입니다. 죽음, 심판 이것이 우리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