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9 인자야 너는 바벨론 왕의 칼이 올 두 길을 한 땅에서 나오도록 그리되 곧 성으로 들어가는 길 어귀에다가 길이 나뉘는 지시표를 하여
20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의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
21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어귀에 서서 점을 치되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서
22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공성퇴를 설치하며 입을 벌리고 죽이며 소리를 높여 외치며 성문을 향하여 공성퇴를 설치하고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세우게 되었나니
23 전에 그들에게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거짓 점괘로 여길 것이나 바벨론 왕은 그 죄악을 기억하고 그 무리를 잡으리라
24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의 악이 기억을 되살리며 너희의 허물이 드러나며 너희 모든 행위의 죄가 나타났도다 너희가 기억한 바 되었은즉 그 손에 잡히리라
25 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마지막 때이니라
26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관을 제거하며 왕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27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설교>
지난주에 하나님은 다시는 칼집에 꽂히지 않을 칼을 빼어들고 계시는 분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나도 내 손뼉을 치며 내 분노를 다 풀리로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내용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분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고통이 언제 끝나는지에만 있었을 뿐입니다.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고 오직 고통이 끝나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칼을 빼어 들고 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믿었을 뿐이고 그들의 관심은 현재의 고통이 끝나는 것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온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우상이라는 것을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인간은 자기를 위해 존재할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존재할 피조물로 지음 받았는데 그 같은 피조물 위치에서 벗어난 것이 자기를 위한 삶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하나님께는 분노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믿을 때 관심은 미래로 향하게 됩니다. 자신의 장래가 어떨지, 또는 자기 자식의 장래가 어떨지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 관심이 사람으로 하여금 복술가, 즉 점치는 자를 찾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현대 사회가 복술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라 할지라도 미래를 알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복술가를 찾지는 않는다 해도 현대 사회에 퍼져있는 여러 방법을 따라 자신의 미래가 어떨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복술가를 찾는다면 그 이유가 복술가 때문이겠습니까? 복술가를 섬기기 위해서, 복술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복술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때문입니다. 자기 미래를 알고 미래가 좋지 않으면 좋은 미래로 바꿀 방법을 찾기 위해 복술가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와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순전히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에는 관심이 가지고,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죄 문제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 신경 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 5:12절에 보면 “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복술을 끊는다는 것은 복술가를 찾는 속성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스라엘이 복술가를 찾는 것과 동일한 속성이 아닌가를 점검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도 보면 능력이 있는 목사, 능력 있는 기도원을 찾아다니는 것이 많고 그것이 복술가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바벨론 왕이 점을 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19,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명하여 “인자야 너는 바벨론 왕의 칼이 올 두 길을 한 땅에서 나오도록 그리되 곧 성으로 들어가는 길 어귀에다가 길이 나뉘는 지시표를 하여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의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고 하십니다.
설명하자면 바벨론 왕이 칼을 들고 들어올 두 길을 그리는데 그 출발점이 같은 곳이 되게 하고 성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에는 표지판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길 중에 한 길은 암몬 사람들의 랍바성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고 다른 한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에게는 암몬 나라도 점령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암몬을 치기 위해 군사를 끌고 출발하는데 길이 두 갈래로 나눠집니다. 한 길은 암몬으로 가는 길이고 한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남은 것은 바벨론 왕의 선택입니다. 그가 암몬을 치고자 하면 암몬이 먼저 무너질 것이고 예루살렘을 치고자 하면 예루살렘에 먼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바벨론 왕이 어느 길로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그는 점을 쳤던 것입니다. 점을 치는 방법은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피는 것입니다. 화살들을 흔드는 것은 마치 점쟁이들이 산통을 흔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쩌면 화살 두 개에 하나는 암몬이라 적고 하나는 예루살렘이라 적어서 흔들어 그 중 하나를 뽑아 뽑힌 그것을 신의 뜻으로 여기는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우상에게 묻는 것은 그들의 우상인 드라빔에게 그들의 방법으로 신의 뜻을 묻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생 제물의 간을 살피는 것은 제물을 바칠 때 제물의 간의 색깔이나 모양, 크기 등이 신의 뜻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고 생각하고 제물의 간에서 신의 뜻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바벨론 왕은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점괘를 얻고 예루살렘을 치게 됩니다. 이처럼 바벨론 왕이 두 길을 놓고 점을 치는 것을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의 연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 바벨론 왕이 점을 치고 점괘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행동한 것처럼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을 점을 치는 것과 같은 속성으로 대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바벨론 왕의 점괘를 거짓 점괘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맹약한 자들입니다. 바벨론에 충성하기로 맹약을 했는데 점괘가 자신들을 치라고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점괘가 나온 점을 엉터리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은 바벨론 왕이 세운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에 원군을 청하여 대항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바벨론 왕이 그 죄를 기억하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령 자신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쪽을 선택해야 좋은 결과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바벨론 왕이 점치는 수준과 같다는 것입니다. 두 길에서 어느 길로 갈지 점을 치며 신의 뜻을 묻는 바벨론 왕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두 길을 그리게 하시고 바벨론 왕이 점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는 신앙은 바벨론 왕이 신을 뜻을 묻기 위해 점을 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보기도 하지만 결국 자기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 자체가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바벨론 왕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당을 찾아서 무당이 섬기는 신의 힘을 빌려 자신의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바벨론 왕의 점괘가 예루살렘을 치는 것으로 나왔을 때 바벨론에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거짓 점괘로 여겼습니다. 자신들은 바벨론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바벨론 편에 있는데 자신들을 치라는 점괘가 나올리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점괘가 암몬을 치는 것으로 나왔다면 그 점괘를 참된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이기에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신의 뜻으로 인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술가나 무당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우상을 앞세워 점을 치며 자신이 원하고 누리고자 하는 인생을 살려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기독교라 하기에는 낯 뜨거운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현재보다 미래가 좀 더 낫기를 소망하고 그 미래를 위해 신을 찾지만 신앙은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자리와 형편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찬송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 됨을 위해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열심히 충성하고 섬기면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으로 기대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우리의 ‘믿습니다’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조건과 상황으로 밀어 넣으시면서 그 가운데서도 ‘믿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세우셨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현재는 좋고 나쁨을 떠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이 믿음을 주신 이유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칼을 빼어 들고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밖에서 바벨론 왕이 점치는 것처럼 자기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왕은 점괘대로 예루살렘을 치고 그로 인해 왕의 왕관이 벗겨지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바벨론 왕이 친 점의 점괘 때문일까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왕의 점치는 종교심까지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 기억하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왕의 왕관이 벗겨지는 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끊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없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왕을 원하고 왕이 세워지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하고 이방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줄 능력 있는 영웅적 왕을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가 부강해지면 자신 또한 부강해 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일에 뜻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한 대로 왕을 세우게 하셨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왕의 왕관의 벗겨 버림으로 이스라엘 모든 왕의 왕 됨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참된 왕은 하늘로부터 오십니다.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참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셔서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왕 되심으로 인해서 그 나라가 참된 생명이 있는 나라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세상에서의 나의 미래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바른 믿음의 관계에 있다면 믿음을 자라게 해서 좋은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왜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점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믿음이 되면 하나님의 뜻 또한 자신에게 좋고 유리한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대로 이것은 신앙이 아니면 하나님이 칼을 빼어 들고 분노하시는 죄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죄를 외면한 채 탄식이 없는 현재의 기독교의 모습이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점을 치듯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우리의 죄에 분노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구원의 조건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죄인에게만 해당됩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서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죄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님을 알았다고 해서 자신을 위한 삶을 잘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는 죄로 인해 지옥 갈 자라는 것입니다. 지옥 갈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모든 죄를 덮으시고 죄 없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신자는 자기 미래에 대해 염려하거나 불안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죽는다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며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확실히 알고 그 세계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