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48강) 암몬의 심판

by 신윤식 posted Oct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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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1:28-32http://onlycross.net/videos/eze/eze-21283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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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8 인자야 너는 주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과 그의 능욕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다고 예언하라 너는 이르기를 칼이 뽑히도다 칼이 뽑히도다 죽이며 멸절하며 번개 같이 되기 위하여 빛났도다

29.네게 대하여 허무한 것을 보며 네게 대하여 거짓 복술을 하는 자가 너를 중상 당한 악인의 목 위에 두리니 이는 그의 날 곧 죄악의 마지막 때가 이름이로다

30.그러나 칼을 그 칼집에 꽂을지어다 네가 지음을 받은 곳에서, 네가 출생한 땅에서 내가 너를 심판하리로다

31.내가 내 분노를 네게 쏟으며 내 진노의 불을 네게 내뿜고 너를 짐승 같은 자 곧 멸하기에 익숙한 자의 손에 넘기리로다

32.네가 불에 섶과 같이 될 것이며 네 피가 나라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네가 다시 기억되지 못할 것이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라 하라

 

 

<설교>

 

지난주에는 바벨론 왕이 암몬과 예루살렘으로 나눠지는 갈림길에서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피는 방식으로 신의 뜻을 묻는 점을 쳐서 결국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점괘를 얻어 예루살렘을 치게 된다는 내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바벨론 왕은 자신이 얻은 점괘를 자신이 섬기는 신의 뜻으로 여겼지만 하나님 외에 신이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바벨론 왕이 얻은 점괘에까지 하나님이 간섭하고 계셨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왕이 점을 치고 얻은 점괘대로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막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그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일까요?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 바벨론 왕처럼 신의 뜻을 묻고 신의 뜻대로 행하면 만사가 형통하다는 사고방식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점을 치고 얻은 점괘대로 하면 잘 될 것이라고 믿는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신앙 수준은 세상 사람이 점을 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당이나 점쟁이의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로 치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되기에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는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면 안된다는 교육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용한 무당이나 점쟁이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집안에 힘든 일이 발생했고 꼭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주변에서 그런 문제를 아주 잘 알아맞히고 해결해주는 용한 점쟁이가 있으니 가보자고 한다면 아무 갈등 없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경우 점쟁이를 찾아가지 않는 것이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신앙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점쟁이에게 가보자는 마귀의 유혹을 뿌리치고 신앙을 지켰다고 여기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주일 오후 설교에 에베소서를 말씀드리면서 6장에서 언급되는 마귀의 간계에 대해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마귀의 간계는 신자로 하여금 점쟁이에게 가게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점쟁이에게 가지 않음으로 자신이 신앙을 지켰다고 믿게 하는 것일까요?

 

 

마귀의 간계는 신자로 하여금 자신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의 믿음으로 점쟁이에게 가려는 마귀의 유혹을 뿌리쳤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살아가는 현실을 잊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늘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 힘으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책임지려고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점쟁이에게 갔든 가지 않았든 죄인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점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가 점괘를 가지고 여러분의 현재와 앞일을 예측하고 그 예측대로 맞는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점쟁이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하겠습니까?

 

 

점쟁이의 관심은 인간의 존재로 향해 있습니다. 점괘를 이용하여 인간의 존재를 굳게 세우고 복되게 하는 길을 말해주는 것이 점쟁이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는 이유라면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무당과 점쟁이를 두고 산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조차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자기 존재를 복되게 하고 굳게 세우고자 한다면 무당, 점쟁이와 다를 바 없음을 심각히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온 세계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현재의 삶의 형편을 기준하여 신앙과 복의 여부를 판단하고자 하는 것은 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암몬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칼은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암몬은 바벨론의 칼을 피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무너져 갈 때 암몬은 그것을 보면서 자신들의 신이 자기들을 지켜주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암몬에도 신이 있고 신에 대한 생각은 모든 인간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암몬에 대해서도 “인자야 너는 주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과 그의 능욕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다고 예언하라 너는 이르기를 칼이 뽑히도다 칼이 뽑히도다 죽이며 멸절하며 번개 같이 되기 위하여 빛났도다”(28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뽑힌 칼은 예루살렘으로만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암몬에게로도 향해 있었습니다.29절에 보면 “네게 대하여 허무한 것을 보며 네게 대하여 거짓 복술을 하는 자가 너를 중상 당한 악인의 목 위에 두리니 이는 그의 날 곧 죄악의 마지막 때가 이름이로다”고 말합니다.

 

 

암몬에도 환상을 말하고 복술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암몬의 복술가들은 어쩌면 바벨론이 전쟁을 위해 길을 나섰을 때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암몬으로 올 것인가를 두고 점을 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점괘가 암몬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나왔다면, 그리고 그들 점괘대로 바벨론이 예루살렘으로 향한 것을 봤다면 분명 자기들의 신이 자신들을 지켜주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환상이며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사고에서 나는 무사할 때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주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암몬을 향해서도 칼을 뽑으셨고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현재의 강함과 성공과 풍족함으로 삶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무너지는 현재만을 생각한다면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온 백성은 흩어지고 바벨론으로 끌려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암몬은 바벨론 왕의 점괘 때문에 당장은 위기에서 벗어나 평안을 누립니다. 바벨론은 강자의 자리에서 부요를 누리며 주변의 나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현재만을 보면 예루살렘이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고, 암몬이나 바벨론 등 주변의 나라들은 예루살렘이 그들의 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거나 하나님이라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롱을 받기도 하겠지만 실상은 암몬이든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바벨론이든 하나님의 칼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현재의 고통과 부요를 기준으로 신과의 관계를 판단하려는 것은 참된 미래에 대해서는 간과한 것이 됩니다. 즉 땅에서 육신으로 존재하는 것만 생각할 뿐 영으로 사는 생명의 세계에는 관심 두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가 좋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고 현재가 나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옳고 그름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고, 현재의 보이는 것들이 일종의 점괘처럼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현재가 좋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쁘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 되어진 일들을 점괘처럼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004년에 발생한 인도양 쓰나미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당시 23만여 명이 숨진 재난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재난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한국의 모 목사는 쓰나미로 크게 피해를 입은 지역은 모두 우상을 섬기는 곳이라며 쓰나미가 일어난 것은 우성을 섬기고 예수를 믿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설교를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는 암몬이 예루살렘을 바라본 것처럼 쓰나미 피해 지역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한국이 아니라 인도양으로 향한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한국의 주변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큰 재난이 많았습니다. 특히 일본은 지진과 해일 등의 재난을 자주 겪습니다. 그 재난을 보면서 누군가는 일본이 우상을 많이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린 심판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재난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것을 암몬을 향한 심판 선포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자체가 하나님이 뽑은 칼 아래 있고 그 칼을 피할 곳은 아무데도 없음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평안을 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평안으로 인해서 자신은 하나님 편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심판에 대해 무감각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31,32절을 보면 “내가 내 분노를 네게 쏟으며 내 진노의 불을 네게 내뿜고 너를 짐승 같은 자 곧 멸하기에 익숙한 자의 손에 넘기리로다 네가 불에 섶과 같이 될 것이며 네 피가 나라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네가 다시 기억되지 못할 것이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라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암몬도,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겉으로는 강하고 부요한 바벨론도 실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미국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부요한 나라가 되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란 나라가 기독교 국가여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변의 나라가 재난을 겪는데 내가 존재하는 곳은 무사할 때 기독교인들은 쉽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육신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육신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처럼 타인이 고통을 겪을 때 자신은 평안을 누리는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평안을 누리다가 평안이 사라지고 고통이 있게 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떠났다가 다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먼지와 같은 우리를 사랑으로 붙드시고 생명에 있게 하신 은혜이기에 신자는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통과 평안으로 은혜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말씀이 아니라 육으로 사는 것일 뿐입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평안을 누리던 암몬도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던 강하고 부요한 바벨론도 역시 심판의 대상입니다. 이처럼 죄 아래 있는 모든 존재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습니다. 암몬이든 바벨론이든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존재는 심판이 전부이지만 하나님의 언약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은 은혜로 이끌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죄를 보여주시고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한 것임을 아는 길로 이끄시기 위해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고통이고 저주이겠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랑을 아는 백성으로 완성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삶은 은혜를 담아 보게 하는 통로입니다. 고통이든 평안이든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기에 신자는 자신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남겨야 하는 길을 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에 매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육신이 아니라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알게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말씀으로 사는 것은 뭔가를 지키고 행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은혜만 남는 것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고통에서도 은혜만 남고 평안에서도 은혜만 남는 것입니다. 때문에 은혜든 말씀이든 육신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육신에 대입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해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과 육신의 간격만 벌어질 뿐입니다. 말씀은 육신을 흙으로 규정합니다. 흙이 어떻게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눈 뜨게 하시고 모든 삶이 은혜와 사랑 안에 있음으로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현재 잘되고 못되는 것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비록 현재가 어려움이고 고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은혜로 끌어가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 남기기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이 믿음의 내용으로 자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타인이 힘든 일을 겪을 때 자신은 평안하다는 것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현실의 의미에 눈 뜬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것은 육신의 풍요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