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56강) 기뻐하는 것을 빼앗음

by 신윤식 posted Dec 12,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겔 24:15-24http://onlycross.net/videos/eze/eze-24152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6.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17.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18.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19.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너는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

20.내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1.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 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

22.너희가 에스겔이 행한 바와 같이 행하여 입술을 가리지 아니하며 사람의 음식물을 먹지 아니하며

23.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채, 발에 신을 신은 채로 두고 슬퍼하지도 아니하며 울지도 아니하되 죄악 중에 패망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하리라

24.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설교>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중에 세상에 통용되는 보편적 상식이나 지식, 또는 윤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은혜로만 이해되고 받아들이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사실입니다.

 

 

작금의 현실은 말씀의 홍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방송과 인터넷 등 수많은 매체를 통하여 누구나 쉽게 설교를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현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은혜 받은 자로부터 나와지는 말씀과 은혜와 상관없이 나와지는 말씀 아닌 말씀은 분명 다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설사 여러분이 어떤 설교에 은혜 받았다 할지라도 그 설교가 은혜 받은 자로부터 나와진 말씀이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쉽게 자기감정에 속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의 감정을 믿지도 치우치지도 말고 냉철하게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하며 우리의 마음을 어디로 끌어가는가를 기준해서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서는 이것을 보기가 힘듭니다. 자기감정과 보편적 상식과 지식과 윤리에 부합되면 진리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기 때문에 말씀이 담고 있는 참된 진리와 은혜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것은 자신의 감정에 와 닿지 않고 감동이 되지 않으며 자기 상식에 부합되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은혜로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말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서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소위 감동적인 예화와 내용으로 각색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만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보다는 당혹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부분은 감동을 주고 어떤 부분은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말씀이 서로 다를 때 가능하다 할 수 있는데 말씀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당혹스러움을 오늘 본문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어떤 부분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까요? 18절에서 말하는 에스겔 아내의 죽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점에서는 에스겔 아내의 죽음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의 아내가 죽게 된 그 배경은 분명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에 의한 급작스런 죽음은 우리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는 세례 요한이나 스데반, 야고보의 죽음에 대해서는 순교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납득합니다. 복음을 위한 거룩한 죽음, 순교로 이해하면서 신자로서 영광적인 죽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아내의 죽음은 우리의 종교적 상식과 감정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납득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쳐서 빼앗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렇다 할지라도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의 눈에 기뻐하는 것을 쳐서 빼앗겠다고 하신 것이 곧 에스겔 아내의 죽음이었고, 따라서 에스겔은 아내의 죽음에도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한 것입니다.

 

 

이것을 17절에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그 어떤 슬픔을 나타내지 말라는 뜻임을 생각해 보면 장례식 자체를 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아침에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아내가 죽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왜 이런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그 때문에 갑자기 죽게 된 에스겔의 아내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에스겔 아내의 입장은 물론이고 급작스런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슬퍼할 수 없는 에스겔의 입장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나님이 에스겔의 눈에 기뻐하는 것을 쳐서 빼앗겠다 하셨을 때에도 에스겔은 그 말씀의 의미가 자신의 아내를 죽게 하겠다는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저녁에 아내가 죽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에스겔은 아내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릴 수 없었고 말씀대로 행합니다. 이러한 에스겔의 행동이 보여주는 것은 자신이 기뻐하는 것을 잃은 슬픔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고통과 슬픔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반응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바벨론으로 포로 되게 하신 일에 대해서도 왜 그렇게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고통과 아픔과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아픔이 없고 고통이 없고 슬픔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것만 중요했고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생각할 때 에스겔에게 기쁨이 되었고 아내가 죽었다면 슬퍼하고 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보편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식과는 다르게 에스겔은 슬퍼하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에스겔의 이러한 행동이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에스겔에게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너는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19절)라고 묻습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고 그들이 마음으로 아끼는 성소를 더럽힐 것이고, 그들의 자녀들을 칼에 죽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21절). 그 고통과 아픔이 너무 커서 죽은 자를 위해 울고 슬퍼할 겨를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22,23절).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기쁨과 행복에만 치우쳐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잘못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본문을 보면서 에스겔의 아내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처럼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에스겔 또한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주시기는커녕 그가 기뻐하는 아내를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 납득이 안되고 불의한 것처럼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 또한 이스라엘처럼 자기의 기쁨과 행복과 아픔을 중요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관심한 자로 살아왔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뻐하는 것을 빼앗기면 아파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우린 지금까지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도외시하며 오직 나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온 죄의 인생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아예 성경을 통째로 암기한다고 해서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께로 끌어갑니다. 때문에 말씀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을 아는 일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자신의 기쁨과 아픔에서도 함께 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것에 중요성을 두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무엇을 한다 해도 그것으로 자기 보람을 삼고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말씀과는 무관한 것일 뿐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말씀으로 살고 말씀을 중요시 하는 것이라고 말 하지만 에스겔의 경우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 생각하는 말씀의 실천은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말씀 실천의 주된 의미는 전도, 구제, 봉사, 헌금 등입니다. 하지만 분명 본문을 두고 생각한다면 말씀 실천은 하나님이 우리가 기뻐하는 무엇을 빼앗으신다 해도 슬퍼하거나 울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가족이 죽어도 울지 않고 슬퍼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 내용은 죽음에 대한 어떤 규례를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겔 16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날 때에 배꼽 줄을 자르지 않고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도 않고 소금을 뿌리지 않고 강보로 싸지도 않은 채 들에 버려진 천한 몸으로 표현합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고 자라서는 사랑하시어 왕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이방 나라가 누리는 것을 아름답게 보고 그들의 것을 사모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로 인한 하나님의 아픔과 분노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쁨과 행복만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아픔과 고통의 자리로 밀어 넣으시면서 울고 슬퍼할 겨를도 없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는 외면했던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스겔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픔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는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잃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쁨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까지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날마다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습니다. 아예 자신을 그러한 존재로 여기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아픔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설사 하나님의 아픔을 얘기 한다 해도 우리가 아파하는 것과 동일한 시각에서 이해할 뿐입니다. 가령 빈곤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아이들로 인해 마음 아파하면서 ‘하나님도 마음 아파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철저히 십자가를 외면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악함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과 같은 내용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는커녕 당혹스럽게 합니다. 또한 누구도 이 말씀대로 되어지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대로 된다면 자신의 삶에 기쁨이 사라지고 슬픔과 아픔이 있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우리의 실상임을 알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은혜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은혜 받지 못한 자가 말하는 말씀 아닌 말씀은 인간의 기쁨에만 관심을 둡니다. 우리를 아픔에서 건져주고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픔에서 건져주시고 기쁨을 주시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과는 무관합니다. 신자의 아픔이 하나님의 아픔에 동참하여 십자가로 연결된 것이라면 우리의 죄로 인해 기뻐하시는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픔 속에서 사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기쁨이 있게 되는 것이 우리를 아픔에서 건지시고 기쁨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기뻐하는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픔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잡아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바치려고 했지만 아들을 죽여야 하는 그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의 아픔을 표징으로 삼아 장차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아들을 버려야 하는 하나님의 아픔을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일컫는 것은, 참된 믿음은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픔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렇다면 자기 기쁨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기뻐하시는 아들을 버리시는 아픔이 동반된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이 기쁨이 되는 백성 되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깊으신 뜻입니다. 혹 내가 기뻐하는 것을 빼앗아 가신다면 그 또한 우리를 십자가로 끌어가시고 십자가에서 아들을 버리신 아픔을 보게 하며 하나님의 아픔을 통하여 나 같은 자를 향한 하나님을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알고 감사하는 자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뜻이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24절)는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내가 기뻐하는 것을 빼앗기면 울고 슬퍼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세상의 것을 마음에 두며 사모하는 것에 대해서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나로 인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을 버리신 것에 대해서 마음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인한 애통이 없이 자기 기쁨을 위해서만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 받지 못한 자의 삶입니다.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구원을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아픔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아픔이 바로 우리 자신으로 인한 것임을 주지하면서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자로 존재할 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기쁨이 되는 그가 바로 하나님이 부르시고 은혜 아래 있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