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3.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4.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5.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6.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으니
7.그런즉 내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8.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를 바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지라
9.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
10.네가 이방인의 손에서 죽기를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다 하라
<설교>
히브리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난 자신들 외에 다른 모든 민족, 즉 비유대인들을 ‘이방인’으로 지칭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있고 이방인에게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도 이방인일 뿐이며 모두가 하나님의 저주 받을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이 그들이 경멸하는 이방민족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심판은 죄에 대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든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이방인이든 죄에 대해 실패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기준점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했어야 합니다.
죄 아래서는 모두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죄는 아브라함 후손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율법을 지키는 민족이라는 것, 이것을 이유로 이방인과 다르다고 여겼고 구원의 대상으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기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는 수준이며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두는 교만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우리 역시 유대인과 다를 바 없는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심판의 기준을 인간이 정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심판의 대상으로 규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설사 자신이 죄가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의 악한 죄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26장에서 언급된 두로의 죄를 기억하십니까? 두로의 죄는 예루살렘이 황폐해짐으로 인해 자신들이 충만함을 얻으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심판이 마땅한 죄로 여겨집니까? 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기준으로는 납득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두로가 심판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를 다루고 계신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구축되어 있는 나의 기준은 무너지고 하나님이 죄로 말씀하시고 심판하시는 그 기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로 왕에 대해 마음이 교만하다 하십니다. 두로 왕의 교만은 스스로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다’는 기준에서 생각하면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두로 왕은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하는 교만한 자이며 심판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만이 두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참된 신으로 섬기는 민족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신이라 하는 교만을 행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신이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단의 교주나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고서는 자신을 신이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나 기독교인은 두로 왕의 교만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죄에 대해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로 왕의 교만은 두로만의 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교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 자체가 신을 거부하고 자신을 신이라 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두로를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통해서 교만한 세상을 어떤 기준과 원칙으로 다루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스스로를 신이라고 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안에서는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사이비, 또는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자신이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자신이 부처가 되는 것을 뜻하고, 무당 또한 신 내림 굿을 통하여 신이 자신의 몸에 들어와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과 하나가 되어 신적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로 작두를 타는 것입니다.
이슬람에는 수피즘이라는 신비주의적 경향을 띤 수피즘이라는 종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신에게 나아가 신과 하나 되기 위한 방편으로 수피라는 춤을 춥니다. 아랍어를 몰라 코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도 신에게 쉽게 다가가 신과 하나 되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종교의 세계에는 신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깔려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신, 즉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말합니다. 요 14:20절을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합니다. 문구대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이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 계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하나라는 관계로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신이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자칫 ‘신일 합일’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 10:34,35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자칭 하나님이라 했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의 죄를 물어 돌로 치려고 했는데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는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그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성경은 앞과 뒤가 다른 말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흙, 티끌, 벌레와 같은 존재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표현을 구약적인 것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해도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로 표현한 것에서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을 어떤 존재로 이해합니까? 대개 보면 신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의 존재, 즉 전지전능한 존재로 이해합니다. 신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도 힘을 가짐으로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엘 오스틴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긍정의 힘’‘잘 되는 나’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미국 목사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전하는 핵심에 대해 “내가 사람들이 알기 원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큰 계획을 갖고 계시고, 우리가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지킬 때 그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의 교회 내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에 내포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마저 자신을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이게 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물질적으로 부요한 삶을 영위 하는 것에 모든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두로 왕의 교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두로 왕의 교만에 대해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3-5절)라고 말합니다.
두로 왕이 무역으로 재물을 얻고 부요를 누리는 모든 것을 자신의 지혜로 된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곳간에 저축되어진 수많은 금과 은을 보면서 자신의 지혜가 크다는 것을 과시하고 스스로를 못할 것이 없는 힘 있는 존재로 여긴 것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로 왕의 교만이라면 과연 누가 두로 왕과 같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엘 오스틴은 “The Power of I AM(나의 능력)”라는 책에서 “자 이제 나를 따라해 보세요. 나는 강합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나는 안전합니다. 나는 재능이 많습니다. 나는 창조적입니다. 나는 훈련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치 있습니다. 나는 아름답습니다. 나는 축복받았습니다. 나는 미래에 있을 일로 인해 흥분하고 있습니다. 나는 승리할 겁니다. 나는 신(하나님)입니다. 좋습니다. 아멘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라고 말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생각한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전혀 기독교이지 않은 이러한 말에 많은 교회가 호응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욕망에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두로 왕의 ‘나는 신이라’는 말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되어서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고 자기 생각대로 모든 일이 되게 하는 것에 뜻을 두고 있고, 일이 잘 되었을 때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된 것으로 여기며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 왕의 지혜와 영화를 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서 죽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두로 왕 앞에 그를 죽이는 자를 두심으로 그는 사람일 뿐이며 신이 아님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이 두로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두로 왕이 스스로를 신이라 하였지만 그가 잊고 있던 것은 그 역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비록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성공을 이루고 그것이 자신의 힘과 지혜로 되어졌음을 자랑하며 그 힘으로 못할 것이 없는 신으로 군림한다 해도 누구도 죽음을 이길 수는 없고 그것으로 모든 인간은 죽음의 저주에 붙들린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스스로를 신이라고 할 때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죽음과 무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은 죽음과 무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과 상관없이 영원한 생명에 있게 되는 그것이 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심으로 죽음에서 벗어난 생명의 존재가 된 것을 신이 된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곳간이 금과 은으로 가득하다해도 죽음을 앞에 둔 인간에게는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죽음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때문에 자기 부요를 자랑하게 되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되었음을 과시하면서 자기를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로 왕의 교만이고 세상의 교만이며 우리의 교만이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자신의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힘에 매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들이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은 힘이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힘을 섬기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생명의 나라’는 관심 밖의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3절에 보면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두로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니엘보다 자신이 더 지혜롭다고 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다니엘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그 지혜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로 왕은 다니엘의 지혜를 자신보다 못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이룬 것을 기준으로 지혜를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지혜 있다 하나 바벨론의 포로였을 뿐이고, 두로 왕은 무역으로 많은 부를 누렸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을 더 지혜 있는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결국은 무너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힘과 부와 권력을 이룬 인간 또한 죽음 앞에 세워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됨으로 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로 존재함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 세상은 무너질 곳으로 보이는 것이고, 어떤 사람도 죽음 앞에 세워진 연약하고 불쌍하고 무능한 존재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죽음 앞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잊는다면 두로 왕처럼 곳간에 금과 은이 쌓이는 것으로 기뻐하고, 그것을 힘으로 삼고 과시하고 자랑하는 인생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죽음과 함께 무너지고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나는 신이라’는 교만에 머물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가장 귀한 것은 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