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63강) 시돈과 이스라엘

by 신윤식 posted Jan 3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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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8:20-26http://onlycross.net/videos/eze/eze-28202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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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1.인자야 너는 얼굴을 시돈으로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라

22.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시돈아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네 가운데에서 내 영광이 나타나리라 하셨다 하라 내가 그 가운데에서 심판을 행하여 내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 무리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지라

23.내가 그에게 전염병을 보내며 그의 거리에 피가 흐르게 하리니 사방에서 오는 칼에 상한 자가 그 가운데에 엎드러질 것인즉 무리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겠고

24.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25.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족속을 모으고 그들로 말미암아 여러 나라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 그들이 고국 땅 곧 내 종 야곱에게 준 땅에 거주할지라

26.그들이 그 가운데에 평안히 살면서 집을 건축하며 포도원을 만들고 그들의 사방에서 멸시하던 모든 자를 내가 심판할 때에 그들이 평안히 살며 내가 그 하나님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설교>

소설가이고 가정문제상담가인 우애령이란 분이 쓴 ‘숲으로 가는 사람들’라는 책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는 삶은 / 누구에게도 오지 않습니다. /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얻는 것만 있거나 / 잃는 것만 있는 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 잃는 부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 상실이 다가올 때마다 더 큰 좌절을 느낄 수도 있지요]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이 글의 내용에 공감할 것입니다. 누구도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고 다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의 소유로 인한 착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타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신으로 인해 낙담하기도 하며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만약 가능하다면 모든 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져야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물음에 항상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일 순위는 돈일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26장부터 등장하는 두로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할 만한 조건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27:3절에서 두로 스스로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라고 말할 정도로 두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두로를 다스리는 두로 왕은 ‘나는 신이다’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할 정도였고 다니엘보다 지혜롭다 할 정도로 지혜와 총명이 있었으며 그 지혜와 총명으로 곳간은 금과 은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13절에서는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라고 말할 만큼 하나님께서 두로 왕에게 주신 조건은 완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에서도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두로 왕이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지음을 받던 날부터 모든 길에 완전하다고 할 정도라면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삶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러한 삶을 두로 왕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이 납득되십니까?

 

 

시 107:9절에 보면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합니다. 좋은 것으로 인한 만족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에게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며 복입니다.

 

 

그런데 두로 왕에게는 왜 그토록 좋은 것들을 허락하셨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로 왕에게 주어진 그것들이 과연 좋은 것들인가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두로 왕의 조건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해당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이 점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21절부터 23절까지가 시돈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고 24-26절까지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시돈은 두로 위에 위치한 도시인데 두로처럼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어서 역시 무역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시돈 역시 두로처럼 부요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성경에서는 두로와 시돈이 함께 언급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돈에 대해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시돈아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네 가운데에서 내 영광이 나타나리라 하셨다 하라 내가 그 가운데에서 심판을 행하여 내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 무리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지라”(22절)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전염병을 보내고, 거리에 피가 흐르게 하고, 사방에서 오는 칼에 상한 자가 그 가운데에 엎드러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돈에 대해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시돈 역시 두로의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점은 우리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두로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죄의 모습이 곧 우리의 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두로와 시돈의 부요는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즉 선망의 대상으로 다가오면서 ‘우리가 두로와 시돈처럼 되었으면’하는 환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처지에 비해 부요하고 강한 힘을 가졌던 바벨론이나 앗수르와 같은 나를 부러워했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한 음란한 여인으로 빗대어 책망하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들 이스라엘 또한 믿음을 말하는 우리가 정작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부자가 선망의 대상이 될 것이고, 취업을 하지 못한 사람은 취업한 사람이 선망의 대상일 것이고, 취업을 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직장인이 선망의 대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선망의 대상인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믿음의 길은 실패일 수밖에 없습니다.

 

 

두로 왕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모든 길에 완전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에게서 드러난 것은 불의였습니다. 그가 처한 환경과 누리는 것들로 인해 비록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보이고, 그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그에게서 드러난 것은 불의와 강포와 교만이었을 뿐입니다.

 

 

시돈도 두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돈에 대해 하나님은 친히 대적하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시돈에 대해 대적하시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시돈만이 저주의 대상이 아닙니다. 두로나 애굽 등의 나라들, 심지어 겔 21:3절에 보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대적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도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주할 자를 저주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두로, 시돈 이들이 비록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고 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결론은 하나님이 대적하시는 대상일 뿐이고 심판 받기로 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로와 시돈이 심판 받기 전에 누리고 있는 것들이 과연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두로와 시돈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것이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방 나라를 등장시켜서 심판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두로 왕은 13절의 내용처럼 최고의 조건과 환경 속에 지음 받았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좋은 것을 다 받아 누리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불의와 강포와 교만이 드러났고 하나님의 심판이 작정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이방 나라를 두고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방 나라의 심판에서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상대하십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이방 나라처럼 하나님이 대적하실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에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다른 점은 이방 나라는 심판으로 끝나지만 이스라엘은 회복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24-26절의 내용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주변에는 많은 이방 나라가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을 찌르고 아프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또한 이방 나라와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일 뿐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앗수르를 동원하여 북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시고 바벨론을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많은 백성들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그 모든 고통과 환난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임을 알고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이방 나라와 다를 바 없는 저주의 존재일 뿐임을 깨닫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게 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비와 긍휼로 대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인 것입니다.

 

 

25절에서는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족속을 모으고 그들로 말미암아 여러 나라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 그들이 고국 땅 곧 내 종 야곱에게 준 땅에 거주할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지만 다시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여러 이방 나라의 눈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모으심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곧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했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며 음란한 여인처럼 행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덮으시고 모으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세상에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에 거주할지라”는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 종 야곱’이 아니라 ‘내 종 이스라엘’라고 하시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자기 탐욕을 위해 존재했던 인간상이 담겨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란 이름에는 하나님이 야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함께 하시고 간섭하시면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자로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야곱에게 준 땅’이라는 말에는 땅을 받을 자격이 없는 야곱에게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해서 땅을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신실하심이 담겨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알 수 있는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약속 아래 있는 것과 약속 밖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확실히 드러나는 것은 두로와 시돈, 그 외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모든 이방 나라들이, 망하고 무너지고 이방 땅으로 흩어짐을 당하며 포로 되어 고통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의 눈에는 선망의 대상이고 모든 것을 가진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들이 결코 좋은 것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그들은 가진 것으로 인해 불의와 강포와 교만이 드러났으면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대적하시고 심판하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심판이 전부입니다. 그들에게는 회복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비록 그들이 이방과 동일한 불의와 죄악을 드러내었고, 심판을 겪었다 해도 그 모든 것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이방 나라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가진 것이 없었고,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신자라 할 수 있습니다.

 

 

히 6:9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구원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두로와 시돈처럼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들이 가진 것이 구원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좋은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의 시각과 기준과 가치관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에 속한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합니다. 우린 이것을 히 6:9절의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사의 눈에는 수만 명의 교인과 수천억짜리 예배당이 ‘좋은 것’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좋은 것으로 다가옵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선망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구원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결정됩니다. 롬 9:13절에서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는 말씀처럼 야곱의 구원은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야곱도 에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데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것으로 야곱의 구원이 결정된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두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합리적이지 않고 불의하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 구원에 초점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잘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는 식의 영광이 아니라 ‘불의로 가득한 나 같은 자를 완전하신 사랑으로 섬겨주심을 감사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만 사랑만 생각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나의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았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을 사고팔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는 방주를 만드는 것보다 그것이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심판에 속했고 노아는 구원에 속했습니다. 노아의 다른 점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아에게는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가졌던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그 사람이야 말로 구원에 속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오늘 우리도 사랑으로 섬기십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에 속한 자가 되게 함으로 천국까지 이끌어 갑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가진 것이 적거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신자야 말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며 이것을 아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