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64강) 바로 왕의 교만

by 신윤식 posted Feb 0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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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29:1-7http://onlycross.net/videos/eze/eze-29010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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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열째 해 열째 달 열두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과 온 애굽으로 얼굴을 향하고 예언하라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4.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의 강의 고기가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너의 강들 가운데에서 끌어내고

5.너와 너의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지리니 네가 지면에 떨어지고 다시는 거두거나 모으지 못할 것은 내가 너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로 주었음이라

6.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7.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하였느니라

 

<설교>

세상과 인생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은 성경에 있습니다. 이유는 세상과 인생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성경은 그 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만약 인간이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과 인생을 해석하게 되면 그 해석의 결과는 필히 뒤틀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기 시각에서 자신을 해석합니다. 가령 두로 왕이 자신에 대해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겔 27:3절)“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겔 28:2)라고 한 것이 자신이 자신을 해석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로 왕이 자신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자신이 누리고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총명과, 금과 은을 소유하고 있는 자신이야 말로 보통 사람과 다르며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신적 존재이고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존재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 평가를 근거로 자신을 해석하기에 성경의 해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로 왕은 자신을 온전히 아름다운 존재, 신적 존재로 해석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강포하고 교만하여 불의가 드러난 존재이며 죽임을 당할 자로 해석하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두로 왕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해석을 기준으로 두로 왕을 보게 되면 그가 누린 그 어떤 것도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두로 왕을 통해서 엿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세상과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은 심판입니다. 이 해석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미 고정된 최종 해석입니다. 때문에 세상과 인생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이나 인생들은 성경이 자신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고정된 운명 아래 있음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자기 인생에 마음을 두고 그 인생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가 세상과 동일한 시각으로 소유한 재물의 정도나, 세상에서의 위치, 권력 등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해석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신자 됨을 벗어 버린 것이고 그의 입술에서 언급되는 하나님 또한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겔 29장부터는 애굽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32장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면 애굽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3절에 보면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스스로를 자기의 강들 가운데 누운 큰 악어라 일컬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의 자기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두로 왕의 자기 해석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같고 가치관이 같기에 두로 왕처럼 소유와 자신이 이룬 업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로 왕이 말하는 ‘자기의 강들’은 애굽의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불리는 나일 강과 여러 운하들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큰 악어는 괴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왕이 이처럼 자신을 강들 가운데 누운 큰 악어로 비유하는 것은 강이 자신을 위해 자신이 만든 자기 소유이며 그 강을 지배하는 자가 자신임을 과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의 자기 해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해석하는 바로 왕은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의 강의 고기가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너의 강들 가운데에서 끌어내고 너와 너의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지리니 네가 지면에 떨어지고 다시는 거두거나 모으지 못할 것은 내가 너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로 주었음이라”(4,5절)는 말씀처럼 하나님에 의해 육지로 던져져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가 될 비참한 운명으로 끝날 존재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해석과 바로 왕의 해석이 다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해석에 눈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과 자신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길입니다. 세상과 자신을 제대로 해석하게 된다면 모든 것의 존재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존재 역시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 같은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인생을 두로 왕이나 바로 왕처럼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바로 왕이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불의한 이성에 의한 잘못된 판단입니다. 잘못된 판단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 3:13절에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라고 말씀하고, 전 5:19절에서는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고 낙을 누리는 것, 그리고 재물과 부요까지 그 출처가 그것들을 누리고 있는 본인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은 인간이 누리고 있는 그 어떤 것도 힘이 될 수 없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본인조차도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면 우리에게서 나와지는 것은 바로 왕과 같은 착각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해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오류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만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애굽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자신들의 희망으로 생각했습니다. 1절에서 말하는 “열째 해 열째 달 열두째 날”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된 지 거의 1년이 되었을 무렵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이나 바벨론에 포로 된 사람들에게는 달리 희망이 없었습니다. 다만 바벨론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로 생각했던 애굽만이 희망이었습니다.

 

 

6절을 보면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고 말합니다. 갈대 지팡이는 몸이 약한 자가 의지하여 다닐 수 있는 수단이고 도구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그만큼 의지의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애굽은 들에 던져서 들짐승과 새의 먹이가 될 존재였을 뿐입니다.

 

 

결국 애굽을 의지한 이스라엘은 애굽을 제대로 보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에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하였느니라”(7절)는 말씀처럼 애굽으로 인해 해를 입게 될 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왕이 강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하고 그 강에 거주하는 자신을 큰 악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불의한 속성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도 애굽을 세상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의지할 지팡이로 여겼지만 실상은 부러져서 오히려 이스라엘의 어깨를 찢고 허리를 흔들리게 할 존재였을 뿐입니다.

 

 

사 36:6절에 보면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는 말을 합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했을 때 랍사게를 히스기야 왕에게 보내어 너희가 애굽을 의지하지만 애굽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어서 갈라져 지팡이 구실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너희의 손이 찔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애굽을 갈대 지팡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앗수르 왕이 애굽을 상한 갈대 지팡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제대로 해석했다고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은 애굽을 자신들이 의지할 희망으로 생각했는데 앗수르는 상한 갈대 지팡이로 해석하며 오히려 유다의 손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애굽을 바라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앗수르 또한 자기의 시각에서 애굽을 해석할 뿐입니다. 앗수르의 기준은 힘입니다. 자신이 애굽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생각 아래 애굽을 상한 갈대로 여기는 것입니다. 힘을 기준으로 자신과 타인의 존재 가치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유다가 믿는 하나님도 무시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실재하는 강한 신이라면 유다가 자신들에게 당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 36:7절에서는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는 말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힘과 연관된 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앗수르만이 아니라 세상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동일한 생각입니다. 신의 존재를 인간의 부와 힘으로 연결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힘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과 함께 하심과 도우심에 대한 모든 의미를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바로 왕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룬 자신의 세상에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왕으로 존재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이방인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조차도 자신에 대한 그러한 기대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란 사실을 잊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희생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희생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당연히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에 관심 두지 않으면 하나님의 희생에는 관심이 가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희생에 관심이 가지 않음으로 해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로 가치를 규정합니다. 그리고 힘이 되는 것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불의한 속성인데 이러한 세상에서 ‘희생하시는 하나님’이 대접받는 것은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대접하지 않는 희생의 하나님을 대접하는 세계가 바로 ‘십자가의 세계’입니다.

 

 

십자가의 세계에서는 힘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로 가치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기준으로 모든 것이 규정됩니다. 때문에 강들을 내 것이라고 하면서 ‘나는 큰 악어다’라고 소리치는 바로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세계에서의 참된 힘, 능력은 인간을 죄에서 건지는 하나님의 희생, 즉 피가 가장 존귀한 것으로 대접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죄를 기준으로 해석하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도 세상이나 우리 자신을 죄를 기준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우리가 추구하는 힘 되는 것은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규정됩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생각, 다른 눈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세계로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에서 세상의 불의한 속성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희생하신 하나님과 상관없이 교회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세상일 뿐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심판으로 종결될 세상인 것입니다. 이것을 애굽이란 나라에 대한 말씀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큰 악어로 규정하고 자신이 거주하는 강 또한 자신을 위해서 만든 자기 것이라고 하는 바로 왕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며 교만한 자라고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또한 바로와 같은 인간 속성을 드러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 힘써 수고하여 거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받게 된 은혜이고 복이라는 말을 덧붙이지만 결국에는 손에 쥐고 있는 것을 근거하여 자신을 해석할 뿐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신자에게 두려움의 대상은 힘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힘은 진정한 힘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옥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애굽이나 바벨론, 앗수르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신자에게 두려움은 내가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 힘을 가지지 못했다가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의 존재를 세상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자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등장하는 것은 모든 죄를 덮으신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희생을 알게 되고 희생에 마음을 두며 감사하게 되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되면 먹고 마시고 누리며 살아가는 모든 것, 부와 재물까지 하나님의 선물로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희생으로 존재하는 기적의 존재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생각한다면 바로 왕이나 두로 왕처럼 자신을 부와 재물을 가진 자로 바라보지 않고,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신 십자가의 피의 능력만을 찬송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