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68강) 꺾인 팔을 꺾어서

by 신윤식 posted Mar 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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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0:20-26http://onlycross.net/videos/eze/eze-30202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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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열한째 해 첫째 달 일곱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1.인자야 내가 애굽의 바로 왕의 팔을 꺾었더니 칼을 잡을 힘이 있도록 그것을 아주 싸매지도 못하였고 약을 붙여 싸매지도 못하였느니라

22.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애굽의 바로 왕을 대적하여 그 두 팔 곧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을 꺾어서 칼이 그 손에서 떨어지게 하고

23.애굽 사람을 뭇 나라 가운데로 흩으며 뭇 백성 가운데로 헤칠지라

24.내가 바벨론 왕의 팔을 견고하게 하고 내 칼을 그 손에 넘겨 주려니와 내가 바로의 팔을 꺾으리니 그가 바벨론 왕 앞에서 고통하기를 죽게 상한 자의 고통하듯 하리라

25.내가 바벨론 왕의 팔은 들어 주고 바로의 팔은 내려뜨릴 것이라 내가 내 칼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고 그를 들어 애굽 땅을 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26.내가 애굽 사람을 나라들 가운데로 흩으며 백성들 가운데로 헤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설교>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본인 스스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믿기로 다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를 하나님이 택한 백성으로 알아보고 찾아오신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와 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구도 믿음에 대해서는 자신의 열심과 힘을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믿음의 출발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의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을 잘못 믿으면’라는 생각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순간도 스스로의 힘으로 주를 잘 믿은 적이 없고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 믿음의 길로 인도 받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예수님을 잘못 믿으면 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예수님을 잘 믿으신 적이 있습니까?’어떤 순간에도 세상을 보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며, 돈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만 의지하면서 세상이나 자녀에게 욕심 두지 않고 순전히 진리의 길로만 가신 적이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순간도 예수님을 잘 믿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정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속을 보지 않고 행함을 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속을 보신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행함을 보게 되면 자신이 바른 믿음의 길로 잘 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서 기독교인다운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착각하면서 인간으로서의 본질은 가려지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의가 부각되면서 결국 자신의 의로 세상의 복과 천국의 상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종교인의 길입니다.

 

 

종교인이란 오로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를 말합니다. 즉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모든 자가 종교인의 범주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믿는 종교가 무엇이냐?’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종교에 따라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구원이 있지 않기에 기독교라는 종교인이든 불교라는 종교인이든 아니면 스스로 종교가 없다고 생각하든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모든 사람이 종교인인 것입니다.

 

 

성경은 ‘나는 종교인이다’는 입장에서 봐야합니다. 어느 누구도 종교인이 아닌 참된 신앙인으로 시작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인과 신앙인의 다른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가장 중점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을 뭔가를 행하고 지키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은 인간이 지키고 행함으로 되는 것은 없음을 알게 되고 그럼에도 의롭고 거룩한 자로 여김 받게 되는 그 내막에 관심을 두고 우리에게 그 같은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에 대해 마음이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내려놓는 전적 무능력의 상태에서 나를 찾아오신 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기복사상이라는 것이 자리하지 못합니다.

 

 

신앙은 인간이 꺾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꺾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은 단지 종교일 뿐이다’는 생각으로 돌아설 가능성은 없으며, 그런 말을 들었다 할지라도 반발로 반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우리에게 개입하시고 간섭하신 하나님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인자야 내가 애굽의 바로 왕의 팔을 꺾었더니 칼을 잡을 힘이 있도록 그것을 아주 싸매지도 못하였고 약을 붙여 싸매지도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라는 위치는 쉽게 꺾을 수 없고 꺾이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자리입니다. 여러분도 가능하다면 바로 왕과 같은 위치에 오르고 싶어 할 것입니다. 누구도 나를 꺾을 수 없고 꺾이지 않을 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왕의 팔을 하나님이 꺾어 버리신 것입니다.

 

 

바로 왕의 팔을 꺾으셨다는 것은 바로의 군대가 바벨론에 포위 당해있는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위해 출전하였다가 바벨론 군대에게 패배한 것을 배경으로 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렘 37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렘 37:5절을 보면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고 말합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시드기야 왕이 애굽에 도움을 요청했고 애굽 군대가 출전하였을 때 바벨론이 잠시 물러가게 됩니다.

 

 

하지만 렘 37:8절에서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고 말씀한 것처럼 바벨론이 다시 와서 애굽을 물리치게 되는데 이것을 하나님이 애굽의 바로 왕의 팔을 꺾었다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2절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애굽의 바로 왕을 대적하여 그 두 팔 곧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을 꺾어서 칼이 그 손에서 떨어지게 하고”라고 말씀한 것은 아예 애굽을 완전히 망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일에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로 왕은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위치에 있습니다. 출 5장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출 5:1)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만약 바로 왕이 그 말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줬다면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께 꺾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왕은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는 말로 모세와 아론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이것은 바로 왕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리는 이런 반응을 보인 바로 왕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 즉 이방인으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왕이 하나님에 대해서 지금 여러분 수준의 앎이 있고 신앙이 있다면 모세와 아론의 요구를 수용했을까요? 쉽게 말해서 지금 여러분께는 하나님의 말씀이 먹혀들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왕이 모세와 아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위한 노동력으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낸다는 것은 애굽으로서는 큰 노동력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왕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현재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자부하는 우리도 바로 왕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순종할 수도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는 바로 왕의 말은 오늘날 종교인에게서 나오는 말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는 바로 왕의 본성을 따라 가는 것이 곧 종교인이고,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서 그 같은 종교인의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좌절하게 합니다.

 

 

평생을 하나님을 믿었다고 자부하는데 그 수준은 바로 왕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인정되십니까? 아니면 ‘나는 바로 왕과 다르다’라고 부인하고 싶으십니까? 물론 신자가 바로 왕처럼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같은 말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 즉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입술로는 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삶이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는 말에 담긴 속성 그대로라면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모든 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였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인의 수준에 있었으면서도 신앙이라는 착각과 허상에 빠져 살았고 매주 교회를 다니며 나름대로 말씀대로 살고 지킨다는 명목으로 행했던 것들로 인해 착각과 허상에 속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이 꺾이는 것입니다. 꺾이고 꺾여서 애굽처럼 칼이 우리의 손에서 떨어지게 되고 무엇 하나 손에 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시는 현장인 것입니다.

 

 

25,26절을 보면 “내가 바벨론 왕의 팔은 들어 주고 바로의 팔은 내려뜨릴 것이라 내가 내 칼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고 그를 들어 애굽 땅을 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내가 애굽 사람을 나라들 가운데로 흩으며 백성들 가운데로 헤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의 본심은 ‘여호와가 누구관대’입니다. 설령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 본심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 년 동안 애굽에 종으로 붙들려 있었던 것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알지 못한 바로 왕처럼 우리 또한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여호와로 인한 것임을 잊고 삽니다. 여호와를 믿어도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했다 생각하고, 그러다가 힘든 일이 있으면 믿음도 무용지물인 것처럼 간주하면서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는 본심만 드러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고 알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칼을 바벨론 왕의 손에 쥐어주고 그를 들어 애굽 땅을 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고 하십니다. 애굽을 나와 다른 이방인으로만 생각하면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는 말씀은 애굽이란 이방민족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굽이란 이방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눈을 뜨고 믿을 수 있을까요? 바벨론에 의해 망한다고 해도 그들은 모든 것을 바벨론보다 약해서라고 생각하지 하나님이 바벨론의 손에 칼을 쥐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한계임을 생각한다면 누구라도 여호와를 알게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결과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되는 것은 왜 굳이 심판이라는 방식을 동원하여 여호와를 알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추방하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조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길로 보내셨다고 해서 불 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조치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불 칼을 뚫고 생명나무의 길로 갈 수 없는 현실에서 생명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성한 한쪽 팔과 함께 꺾으신 팔을 또 다시 꺾어 버리신 것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의 입맛대로 존재하시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도우시고 세상의 복으로 채워주셔서 그 마음을 흡족하게 하시는 분이라면 꺾은 팔을 또 다시 꺾으시는 것이 아니라 꺾은 팔을 원상태가 되게 하시고 원래보다 더 힘 있는 팔이 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겔 39:1-7절에“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곡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너를 돌이켜서 이끌고 북쪽 끝에서부터 나와서 이스라엘 산 위에 이르러 네 활을 쳐서 네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네 화살을 네 오른손에서 떨어뜨리리니 내가 또 불을 마곡과 및 섬에 평안히 거주하는 자에게 내리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을 민족들이 알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곡에 대한 심판의 말씀인데, 그에 대해서도 활을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오른손에서 화살을 떨어뜨린다고 하십니다. 활과 화살을 손에서 떨어뜨린다는 것은 전쟁에서 모든 힘을 잃어버린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손에 쥐고 있는 힘을 떨어뜨리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마곡과 섬에 평안히 거주하는 자들에게 불을 내리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심판의 내용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은 인간의 기대하는 신의 속성에서 벗어나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 대한 판단을 여러분 스스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 행위만을 바라보는 인간이 스스로 신앙을 판단하게 되면 항상 구원 받을만한 존재로 보이게 됩니다. 여러분에 대한 판단은 말씀이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판단하기에 누구도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규정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건져주지 않으시면 영원히 지옥에 갇힐 자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든 애굽이든 심판의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 역시 자신의 존재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구원에 해당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연구와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 14:8-9절에서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한 것처럼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꺾은 팔도 꺾으시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이십니다. 꺾은 팔을 다시 붙여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란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아시며, 하나님이 아신 그들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꺾은 팔을 꺾으시면서 까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게 하시고 여호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손에 쥐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손에 쥐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붙들고 있는 것을 떨어뜨리면서 세상의 것이 헛됨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된다면 그 속에 꼭 쥐고 있는 모든 것이 꺾이며 떨어뜨려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