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70강) 지하로 내려감

by 신윤식 posted Mar 1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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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1:10-18http://onlycross.net/videos/eze/eze-31101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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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0.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솟아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11.내가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 줄지라 그가 임의로 대우할 것은 내가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쫓아내었음이라

12.여러 나라의 포악한 다른 민족이 그를 찍어 버렸으므로 그 가는 가지가 산과 모든 골짜기에 떨어졌고 그 굵은 가지가 그 땅 모든 물 가에 꺾어졌으며 세상 모든 백성이 그를 버리고 그 그늘 아래에서 떠나매

13.공중의 모든 새가 그 넘어진 나무에 거주하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지에 있으리니

14.이는 물 가에 있는 모든 나무는 키가 크다고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그 꼭대기가 구름에 닿지 못하게 하며 또 물을 마시는 모든 나무가 스스로 높아 서지 못하게 함이니 그들을 다 죽음에 넘겨 주어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게 하였음이라

15.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가 스올에 내려가던 날에 내가 그를 위하여 슬프게 울게 하며 깊은 바다를 덮으며 모든 강을 쉬게 하며 큰 물을 그치게 하고 레바논이 그를 위하여 슬프게 울게 하며 들의 모든 나무를 그로 말미암아 쇠잔하게 하였느니라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7.그러나 그들도 그와 함께 스올에 내려 칼에 죽임을 당한 자에게 이르렀나니 그들은 옛적에 그의 팔이 된 자요 나라들 가운데에서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던 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설교>

앗수르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할 정도로 번성하였습니다. 앗수르의 번성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는 지난 주 설교의 본문인 31:1-9절을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앗수르의 번성을 시기하였다는 것은 그들 역시 앗수르의 번성을 원했고 소망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심겨진 나무라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무지한 채 다만 눈에 보이는 번성에만 매달리는 이스라엘에 빗대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기독교인, 즉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번성한 애굽과 앗수르와 같은 나라를 의지하고 부러워하며 시기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예배당을 찾으며 번성을 꿈꾸는 작금의 기독교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덴의 모든 나무가 시기할 정도로 번성했던 앗수르는 이미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멸망하여 사라지고 없는 앗수르의 번성을 애굽을 향해 말씀하심으로 앗수르의 위엄에 비할 정도로 번성한 애굽 역시 멸망할 것임을 외치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눈에 보이는 번성의 헛됨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번성의 유혹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번성하고 높아지는 것을 인류의 목표로 삼고, 그 옛날 인간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던 것처럼 자기의 높아짐에 몰두하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종교인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번성은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번성하면 망한다는 것이 아니라 번성이 믿음의 증거가 아니란 것입니다.

 

 

앗수르의 번성은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앗수르만이 아니라 애굽, 두로, 바벨론 등 모든 국가의 번성은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약하다면 그 또한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번성을 원하고 약함을 싫어하지만 하나님께는 번성이나 약함이 선의 기준이 아닙니다.

 

 

즉 번성이 선이 아니고 약함이 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성과 약함, 어느 것도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없고 다만 번성이든 약함이든 하나님이 조성하시고 있게 하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속에 품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는 사도 바울의 말에서 신자에게서 나타나야 할 믿음의 증거가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앗수르는 번성으로 인해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이것을 10절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솟아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라고 말합니다.

 

 

번성한 이방민족의 특징은 교만입니다. 인간은 교만에 대해 하나로 모아집니다. 성격, 모습 등 모든 것이 다르지만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만이 번성한 이방민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약한 자 또한 예외가 아니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약함에 불만이 있었고 번성을 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번성에 존재 가치를 두었다는 뜻이고 번성한다면 앗수르와 동일하게 그 마음이 교만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앗수르의 교만에 하나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교만은 인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성품이나 인격이 아닙니다. 교만을 성품과 인격의 시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교만해도 나는 겸손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교만을 이기고 겸손해질 수 있다는 자기 가능성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 또한 교만입니다.

 

 

인간은 번성하게 되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확보하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번성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번성하게 하신 분이 있음을 무시하며 번성으로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타인보다 더 번성하게 되었다 해도 인간의 존재 가치를 가시적 번성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 둔다면 번성이든 약함이든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의 관계에 있게 하신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교만은 강자가 갑질하는 수준이 아닌 더 본질적인 문제에서 판단해야 하는데, 그것이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입니다. 때문에 교만은 한 개인이 어느 특정인을 향해 내리는 판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롬 14:10절에 보면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든 비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서 교만이라고 생각되는 모습이 보인다면 가장 먼저 그의 교만을 통해서 자신의 교만이 고발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대개의 경우 자신이 교만이라는 악으로부터 조금 멀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은 번성한 자가 아닐뿐더러 소위 번성한 강자의 갑질과도 무관하다고 생각함으로 교만을 다른 이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겸손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번성하든 번성하지 않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 곧 자신임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 할 말이 없는 자로 주 앞에 서는 것입니다. 자신의 번성을 바라보지 않고 약함을 바라보지도 않고 다만 죄 밖에 나올 것이 없는 무능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에 온 마음이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아니면 비참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의 번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모든 가치를 둘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이며 신자의 겸손입니다. 결국 교만이 인간의 성품 문제가 아닌 것처럼 겸손 역시 성품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이는 물 가에 있는 모든 나무는 키가 크다고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그 꼭대기가 구름에 닿지 못하게 하며 또 물을 마시는 모든 나무가 스스로 높아 서지 못하게 함이니 그들을 다 죽음에 넘겨 주어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게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망해버린 앗수르를 등장시켜서 그들의 번성을 말씀하시는 것은 키가 크다 하여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하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나무들이 교만한 나무의 운명, 교만한 나무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보고 자신의 높음으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게 하는 것을 그 이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키가 크고 가지가 번성한 나무였던 앗수르도 하나님이 보내신 다른 민족에 의해 찍혀 넘어지고 그 가지는 꺾이고 사람들은 그를 버리고 그 그늘 아래에서 떠났습니다. 이것이 번성의 실상입니다. 그런데도 번성을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말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번성한 앗수르를 찍어 꺾어 버리고 지하로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지하는 죽은 자들의 세계, 곧 음부를 뜻합니다. 이것을 15절에서 스올로 말합니다. 그리고 이 스올로 앗수르를 비롯한 모든 나무들이 모아집니다. 에덴의 모든 나무도 지하로 내려가고(16절), 앗수르의 그늘 아래 거주하던 자들도 지하로 내려갑니다(17절). 이것은 모든 인간이 죽음으로 모아질 수밖에 없으며 죽음이 곧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인간을 판단하려면 그 기준이 번성이 아닌 죽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에덴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을 에덴으로 상상하고 에덴과 같은 삶의 환경을 꿈꾸며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덴의 참된 의미, 본질은 생명나무에 있습니다. 에덴이 어떤 곳이었든 상관없이 그 곳에 생명나무가 있었다는 것이 에덴을 에덴 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혀 버린 에덴은 에덴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된 것이고 지하, 즉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것에 몰두해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의 조건을 번성해지는 것에서 찾습니다. 에덴의 나무처럼 최상의 환경을 꿈꾸며 그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는 현실은 지하입니다. 죽은 자들의 세계가 모든 인간이 머물 최종의 자리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생존한 상태에서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무엇을 누리며 어떤 형편에 있든 지하로 끌려 내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잠시 동안 누리는 세상의 높아짐을 자랑할 수 없는 것이고 낮은 위치에 있다 하여 실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종적 평가는 누가 지하에서 건짐 받는 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그가 바로 겸손한 복 있는 사람입니다.

 

 

14절의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음에 넘겨진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따라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정해진 길입니다. 지금은 다만 아주 잠시 동안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현실에 등장한 유일한 희망이 생명입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생명나무의 길이 차단된 상태에서 생명의 길이 되어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희망으로 함께 하신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생명이 함께 하는 것이 에덴의 참된 의미라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동산 에덴은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번성하든 쇠약하든 그것을 현실의 전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자의 진짜 현실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진짜 현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석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가 함께 해주신 여러분이야 말로 가장 귀한 복의 세계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결국이 무엇인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 것입니다. 이것을 전 9:3절에서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합니다.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살다가 종국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갑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할 자가 아무도 없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하로 내려간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살아있을 동안 최상의 삶을 누리는 것에 몰두합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 받는다’는 것으로 내세에 대해서까지 자기 멋대로 결론 내려놓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 동일하게 현재의 번성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만이며 저주의 모습입니다.

 

 

전 9:4,5절을 보면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고 말합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기 때문입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보면서 자신 또한 죽음으로 들어가야 할 존재임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고, 죽음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면서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헛된 것이며 높아지기 위해 살았고 높음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어리석음이었음을 생각하게 된다면 그 또한 지금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모르고 죽은 것 자체가 곧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께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은 오늘도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셨기에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는 것이고 말씀을 들으며 인생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생명 된 그리스도가 에덴이 되신다는 것에 대해 들으며 그리스도께 마음을 둘 수 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높아지고 낮아짐을 떠나서 살아있음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세상에서 높아짐이 자신이 추구할 방향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겸손을 알게 되는 것도 지금 살아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18절을 보면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고 말합니다.

 

 

에덴의 어떤 나무보다 영광스러웠고 위대했다 할지라도 결국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로 내려간다는 것은 애굽의 바로 왕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영광스러웠고 위대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하에서는 이미 죽은 자들 사이에 함께 누워있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교만으로 인한 운명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모든 인간이 지하로 내려가게 되는 현실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일이 중요하고 그 일에 온 마음이 집중되어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잠시라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모든 일이 여러분의 생각한 바대로 성취되었다고 해서 지하로 내려가는 운명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이 이유가 아닙니다.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에서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새 언약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를 새 언약에 있게 하시며 번성과 약함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복된 믿음의 세계가 있음을 배우게 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언약의 능력으로 주를 바라보게 되고 그 주를 세상에 나타내고 증거 하라고 나를 살려주셨음을 생각하십시오. 높아지지 못한 것으로 인한 실망과 초라함에서 벗어나 지하에서 건짐 받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속한 자로서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는 바울의 고백이 뜨거운 열정이 되어 여러분을 붙들어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길로 가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