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75강)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by 신윤식 posted Apr 3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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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3:17-20http://onlycross.net/videos/eze/eze-33172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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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니라

18.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에서 죽을 것이고

19.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20.그러나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세상은 선인을 원합니다. 선한 성품으로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살기 좋은 아름다운 곳으로 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개의 기독교인들도 신자가 선한 행실을 보이며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합니다. 모범적인 삶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전도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인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모범적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상관없이도 그러한 삶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범적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신앙과 불신앙은 서로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능한 양심적으로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이며 신자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자신은 뉴스에서 손목에 수갑을 차고 모자를 쓰고 입에는 마스크를 하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악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합니다.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는 것이 바리새인적임을 알고 있고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서로 상반되는 양면의 자기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죄인으로 인식하면서도 죄인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의식 한편에 의인이라는 의식이 살아있습니다. 결국 죄인이라는 자기 인식은 관념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의인과 죄인으로 구분합니다. 예수님도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을 위한 예수님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죄인이 옳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 자신을 의인으로 여긴 대표적인 존재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명 율법을 실천하며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죄인으로 여김 받았던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바리새인과 같은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많아야 좋을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와 같은 존재가 많아진다면 세상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모범적인 삶을 사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고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의가 아니며 의인 되는 길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모범적인 삶을 산다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을 행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죄인이라는 자기 인식입니다.

 

 

본문에 의인과 악인이 등장합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죽을 것이고(18절), 악인이 돌이켜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19절). 이 말씀대로 이해한다면 악인이 돌이켜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는 의인이 되어 살게 됩니다. 하지만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는 다시 악인이 되어 죽습니다. 따라서 악인이 돌이켜 의인이 되었다 해도 죽지 않는 길은 끝까지 공의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공의에서 떠나지 않고 죄악을 범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자 되었다 해도 인간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죄에서 돌이켜 정의와 공의대로 행한다 해도 또 다시 죄악을 범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9-12)라고 말했습니다.

 

 

의인도 선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고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신약 시대에 정립된 사상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기록된 바’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시 14:2-3절의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는 말씀과 시 53:2-3절의“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는 말씀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처럼 의인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의 선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말씀하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고도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다 하면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의인의 기준입니다. 의인은 없다는 것은 선한 행위로 인한 의인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한 행위가 의로 인정되어 의인되는 인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에 의한 의인은 있습니다.

 

 

믿음에 의한 의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며 찾는 그를 의인으로 일컫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찾는다면 그 이유는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믿음에 의한 의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알았던 의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의인이 돌이켜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죽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13절에서도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어떤 의로운 행위가 있다 할지라도 단 한번이라도 죄악을 행하면 모든 의로운 행위는 전혀 기억되지 않고 죄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평생을 악을 행한 악인이라 해도 죄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로 행하면 그가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않고 반드시 산다는 것입니다(14-16절). 여러분은 의인과 악인에 대한 이 같은 조치가 이해되십니까?

 

 

더군다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죄인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살게 되었다 해도 다시 돌이켜 죄를 행하면 그 죄로 말미암아 죽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누구든 끝까지 죄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살게 되는 사람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취지는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정의와 공의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도, 악에서 떠나라는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죄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에 머무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것이 곧 하나님을 믿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주의 길이 바르지 않습니다’라고 반응합니다(20절).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키며 그것을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으로 여겼던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단 한번이라도 죄악을 범하면 죽는다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의인이 죄악을 범한다 해도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섬겨왔고 율법을 지켜왔던 공로를 인정하여 용서하여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며 불만을 표출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든 악을 행하든 그 행한 대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에 부당함은 없습니다. 의를 행하면 살 것이고 악을 행하면 죽는다는 것은 세상이 심판의 원칙으로 여기는 상선벌악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한 대로 심판하겠다는 원칙 아래서 인간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은 공의에서 떠나지 않고 죄악을 행하지 않는 것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행한 대로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법아래서 모든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이방인은 물론이고 이스라엘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언대로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행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행함만 바르면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정복되고 자신들은 포로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이유가 자신들의 허물과 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허물과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바라보며 허물과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10절)라며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에게 ‘돌이키고 돌이키라 악한 길에서 떠나라’고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파수꾼의 역할입니다. 파수꾼은 악인의 길에 임해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칼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돌이키라고 촉구하는 것이 곧 경고의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같은 파수꾼의 경고를 받아들이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악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자리에 있다가 허물과 죄로 인해 악인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의 본질이 악인이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악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착각했고 자신들이 행하는 율법이 의가 되어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멸시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본질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들 생각에 의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악인’이라는 본질에서 동일합니다. 제아무리 모범적인 삶을 산다 해도 ‘악인’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범적이고 선한 행실의 삶을 산다 해도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구원은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악인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구원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열심을 강조하며 그것을 좋은 신앙으로 부각시키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파수꾼의 역할을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6절)는 말씀에 해당되는 것이고 교회가 곧 심판의 대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악인의 길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죄인이라는 의식은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인이라는 의식이 추상적이고 관념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칼을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대상임을 경고하며 악인의 길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악인의 길에서 돌이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악인은 자기 의로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이스라엘처럼 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 의로운 자라는 칭함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모범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게 합니다. 이것을 현대 교회가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하나님은 자기 의를 거부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악인의 길에서 돌이키는 것은 자기 의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자기 의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의가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인간의 의가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해 의에 속하게 됨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성전의 제사를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제사를 행하면서도 제사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입니다. 비록 여전히 세의 세력에 붙들려 죄를 행하며 살아가지만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만 소망을 두고 바라보는 신자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자로 여김 받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신자에게는 자기 의가 없습니다. 자기 의가 없기 때문에 비록 모범적인 삶을 살고 훌륭한 인격자로 인정받는다 해도 스스로를 의인으로 인식하지 않고 함께 한 모든 지체와도 죄인의 자리에서 교제하게 됩니다.

 

 

지금의 기독교인의 신앙은 가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 업적을 내세워 인정받기위해 경쟁하는 분위기로 가득합니다. 소위 열심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보였던 자기 의라는 사고방식이고 악인의 길이며 그 길에서 돌이키라는 촉구를 받았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불만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당연히 더러운 자로 구원 받지 못할 부류에 속했을 뿐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자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또한 죄인이라는 사실에 무지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비록 율법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끝까지 죄악을 범하지 않고 정의와 공의대로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긍휼과 자비가 없이는 죽을 자에 지나지 않음을 모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존재한다면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의를 추구하고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것에 대해 엄히 경고해야 합니다. 의와 악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착각일 수 있음을 증거하며 자신의 허물과 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소망임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존재하게 하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