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77강) 이익을 따라

by 신윤식 posted May 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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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3:30-33http://onlycross.net/videos/eze/eze-33303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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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0.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31.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2.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33.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설교>

‘신앙이 깊어졌다’는 말을 많이 하고 듣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신앙이 깊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고, 주변 사람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이 깊어지는 것일까요? 대개는 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성경을 많이 읽거나 교회 일에 더 많이 수고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은 신앙과 상관없이 자기의 열정과 열심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보게 되며 그 세상을 믿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깊어졌다면 그것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세상보다 말씀이 증거 하는 세상, 즉 영원하고 참된 세상에 더 크게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을 보면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한 의도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31절에서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고 말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의 마음 또한 항상 자기의 이익을 좇을 뿐입니다.

 

 

마음이 이익을 따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는 세상을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의 세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세상이 주는 평강과 영광과 존귀와 가치를 외면하고 육신의 이익을 좇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글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글자고 단어고 한 권의 책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원한 세계를 보여주며 그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보여주는 세계는 알아가는 것을 신앙이 깊어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말씀이 내 삶에 밀접하고도 깊은 내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고 믿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에는 자리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음으로는 자기 이익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이미 자기 이익을 좇고 있기에 자기 이익과 무관한 말씀의 세계가 깊은 내용으로 다가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이고 오늘 우리의 문제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입으로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복음도 말하고 천국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향합니까? 나의 이익이며 세상에 대한 기대입니다. 하나님도 나에게 이익이 되고 기대를 채워주는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말씀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 나라의 우상은 인간의 요구에 응답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의 우상을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에 응답하는 분이 아닙니다. 현대 교회가 이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긴 것과 동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와 같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신다면 이런 의문을 가져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우리의 신앙을 좀 더 강하게 하셔서 그러한 문제들을 이기며 바른 믿음의 길로 가게 하지 않으시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 강하게 하시고 깊어지게 하셔서 마음으로 자기 이익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시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게 살게 하면 되지 않는가?’입니다.

 

 

이 의문은 선악과를 먹은 일에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의문에 대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자유의지에 의한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과 악의 선택을 인간에게 일임하셨다는 의미가 되는데 만약 그렇다면 인간에게 구원은 절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애초부터 악의 세력을 극복할 수 없고 결국 자기 이익을 좇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불가능한 구원을 가능한 구원으로 바꾸기 위해 자유의지로 실패한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능하게 하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인간의 구원에 고정시켜 해석하는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자기 이익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문제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하시고 마음으로 내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게 하시면 되는데 왜 믿음에서 멀어진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행하심에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매일 같이 우리의 실패를 보게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믿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에 눈이 열리고 알아가게 되면 우리가 평소 평범하게만 생각했던 일상생활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과 기적으로, 그리고 크신 은혜로 다가오게 됩니다. 사소하고 평범하게만 보이는 삶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보게 되는 그것이 신앙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말씀을 듣는다면 단지 목사의 설교 한편을 듣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부터 이미 선지자로부터 예루살렘이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겔 4:1-3절을 보면 “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토판에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공격을 당하는 모습을 그리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 무너뜨릴 것에 대해 이스라엘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지고 황폐하게 될 것에 대해 계속 경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에스겔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예루살렘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도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것을 경고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렘 38:3)고 외쳤지만 이 말을 들은 자들은 단지 악담하는 것으로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렘 38:4)는 반응을 보였을 뿐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의 말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황폐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24절)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자기 이익을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듣게 된 바벨론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는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그의 말대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담 곁에, 집 문에 모이면 에스겔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자연히 에스겔의 말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래서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라며 모여들어 에스겔의 말을 듣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까지 칭찬했습니다.

 

 

만약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설교자에 대해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무엇보다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이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선지자도 그러한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 때문인지 하나님은 백성들이 나아오고 네 앞에 앉아 말을 듣는다 해도 그들은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에게 속고 교인은 목사에게 속을 수 있습니다. 교인은 목사가 복음만을 설교한다고 생각할 때 그를 참된 목사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리만을 추구하고 진리의 길로만 가는 목사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 역시 마음으로 자기 이익을 좇는 자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복음을 말하나 마음으로는 이익을 좇는 것입니다.

 

 

때문에 목사가 복음을 말한다면 그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말씀의 세계에 눈이 열리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목사가 복음을 말한다는 것 때문에 목사를 믿어버린다면 복음이 증거 하는 세계를 바라보기보다는 복음을 증거 하는 그 사람을 따르고 높이는 것으로 자신이 복음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목사 역시 교인이 자신의 설교 듣기를 좋아하고 ‘은혜 받았습니다’‘목사님의 설교가 복음만 전해서 좋습니다’라고 말할 때 기분이 좋아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교인을 자기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인을 믿는 것이고 그 또한 사람에게 속는 것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서로를 의심하고 관계를 멀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입으로는 은혜와 사랑을 말한다 해도 본질적으로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복음을 증거 한다고 생각된다면 목사를 세워서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말씀의 세계를 알아가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교인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으로 인해 기뻐한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행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그로 인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실감하게 되면서 말씀을 증거 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복음을 전하든 복음을 듣고 믿으며 받아들이든 그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마음을 두면서 감사하는 이것이 말씀이 역사하는 현장인 것입니다.

 

 

사 29:13절에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믿음과 열심으로 실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받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자신의 실천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즉 자기 실천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복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같지만 그 마음은 자기의 이익을 좇고 있기에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라고 하는 것도 에스겔의 말대로 예루살렘이 무너졌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에스겔의 말에 관심을 두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의도는 에스겔이 전하는 말을 통해서 자신들이 알지 못하고 오해했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언한 에스겔의 말대로 하면 뭔가 자기에게 이익이 있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나는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 한다’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말하고 믿는다 해도 삶은 언제나 내 이익을 따랐을 뿐입니다. 이 같은 우리의 실상이 ‘나는 십자가를 말한다’는 것에 의해 가려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말씀을 들을 때는 언제나 자신을 보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죄인의 괴수라는 고백이 있게 되고, 이사야 선지자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이 말씀으로 자기를 보는 것이고 모든 죄를 가리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증거로 가득한 말씀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이익을 따라 에스겔 앞에 모여 그 말을 듣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이익을 따라 예수님을 찾고 말씀을 듣고자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만족이 되는 말이 아니면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러분의 실상에서 놓치지 말고 확인해야 하는 것은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고 말한다 해도 마음은 자기 이익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 제대로 확인한 신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행하신 은혜로 간주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인한 은혜와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삶이 감사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이익을 따르고 있음을 실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진리의 길에 존재할 수 없는 더욱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과정을 겪게 하시면서 우리를 은혜의 길로 이끄십니다.

 

 

여러분은 복음이 좋습니까? 왜 좋습니까? 혹시 복음은 헌금하라고 하지 않고 봉사하라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짐을 질 필요가 없어서 좋은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자기 이익을 따르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복음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내가 힘들어지는 것은 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이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나름대로 자기에게 만족이 되기 때문에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말씀의 세계를 알게 되면 여러분 자신이야 말로 구원 될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 될 수 없는 우리를 붙드시고 생명으로 끌어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되고 목적이 되고 전부가 되는 신앙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