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010.01.18 18:14

(4강) 교회의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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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1:15-20http://onlycross.net/videos/Colossians/col-011520.wmv

<본문>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15-20 개정)

 

 

<설교>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일을 겪게 됩니다. 때로는 기쁨이 되는 일도 있지만 고통과 슬픔이 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쁨이 되는 일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되지만 고통과 슬픔이 되는 일에서는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을 주시는지를 몰라서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욥과 같은 심정이 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하박국의 심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불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따로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성경에 있는 것처럼 꿈을 꾸게 하신다거나 따로 계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하시고 말씀하신 것을 알려주는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성경을 통해서 세상과 인생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일들, 그리고 그에 대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나 예수님의 말씀이나, 선지자 사도들의 말들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통해서 신자는 조금씩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게 됩니다.

 

 

골로새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들어옴으로 인해서 교회에 혼란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런 경우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를 보호하시는 것이 마땅하고, 그렇다면 거짓 선생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시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복음이 아닌 다른 말을 전하는 거짓 선생을 하나님이 미리 심판해 버리시고 교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면 골로새 교회처럼 교회가 혼란을 겪을 일도 없을 것이고 다른 복음에 빠지는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거짓 선생들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데도 그냥 두고 보실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쓰는 사도 바울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골로새 교회에 등장한 거짓 선생으로 인한 문제 때문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루속히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편지를 써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럴러면 가장 먼저 거짓선생들의 말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낱낱이 밝힌 다음에 그들을 교회에서 쫓아낼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처리하는 우리들의 생각이고 방식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평안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목사들이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고 시끄러워지면 가장 힘들어지는 사람이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가 아무런 문제없이 평안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교회다운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혹 누군가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문제를 일으킨 그 사람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만 처리하면 교회가 조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골로새 교회도 가장 급한 것은 거짓 선생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거짓 선생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는 먼저 골로새 교회의 믿음과 사랑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사도가 어떠한 기도를 했는가에 대해 언급하고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다는 말을 합니다. 과연 이러한 내용이 골로새 교회의 문제 해결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본문에서도 사도는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만 말할 뿐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다른 복음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함으로 혼란이 발생했으니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되면 다른 복음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자연히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예수님은 이런 분이고 복음은 이런 것이다. 그러니 거짓선생들의 말의 경계하고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말아라’라는 목적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라면, 우리는 골로새서를 보면서 복음을 배우고 그 복음으로 다른 복음을 구별하고 가려내는 일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할 일일까요?

 

 

물론 다른 복음을 분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2장에 보면 바울은 교회를 혼란케 한 거짓 선생들의 다른 가르침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고, 3장에서는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를 것을 권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참된 복음을 알고 그 복음 위에 견고히 서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훼손하는 다른 복음을 용납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복음을 안다고 여기는 자신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참된 복음 편에 세워둘 수 있습니다. 즉 나는 예수님 편이고 너는 사단 편이라는 식의 구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별이 아닙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다른 복음에 대한 분별이 자칫 나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을 나로부터 배척하는 것으로 나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깨닫게 된 복음으로 예수님과 자신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가를 살피면서 나를 알고 나를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복음이지만 그 삶은 전혀 복음이 아닐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중점을 두는 것도 이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거짓 선생들의 말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가르치고, 그들을 쫓아내는 방식으로 교회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교회는 평온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다른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고 참된 복음만 가르쳐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서는 교회가 된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다른 복음을 분별하고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참된 복음의 말만 받는다고 해서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선 교회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곧 여러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아는 신자된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서 있다는 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이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가신 길에 순종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사도가 증거한 참된 복음을 알고, 그래서 다른 복음을 분별할 수 있는 분이 여러분이라면, 그런 여러분이 세상의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순종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 문제 해결이 관심이 아니라 교회에 혼란이 발생한 것을 기회로 삼아 골로새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더욱 깊이 알게 하고 그래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욱 강하게 인도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서신에서 엿볼 수 있는 사도의 마음입니다.

 

 

사도는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말합니다. 이 모든 말의 의미는 우리는 피조물로써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고 머리되신 예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신자의 존재 의미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다른 복음이란 예수님을 위한 나가 아니라 나를 위한 예수님으로 바꿔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복음을 안다고 하는 여러분께 누군가가 ‘나는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고 싶다’는 말을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잘못된 말이라고 야단을 치고 아예 그런 말은 하지도 못하도록 입을 막아 버리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은석교회에서는 아예 그런 말은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복음적인 교회입니까?

 

 

바울은 예수님이 만물의 근본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고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라고 증거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증거대로 예수님이 여러분의 근본으로 되어 있습니까? 과연 예수님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로써 예수님을 위해 삽니까?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된 우리는 무엇에 복종을 하며 삽니까?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복종하고, 내 욕망에 복종하고, 나의 편함과 이익에 복종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를 말한다고 해서 복음을 알고 복음을 사랑하는 복음적인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싸우고 다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심령에 살아계신다면,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을 짓누르고 있다면, 신자는 내가 바로 다른 복음을 좇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에 찾아오셨고 우리 심령을 깨뜨리시면서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주의 은혜위에 확고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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