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010.02.01 21:46

(6강) 복음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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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1:18-23http://onlycross.net/videos/Colossians/col-011823.wmv

<본문>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 1:18-23 개정)

 

 

<설교>

사람은 자신의 눈에 비취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항상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과 함께 부족함을 느끼고, 그 부족함으로 인해서 인생의 행복까지 상실한 채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라고 이름하는 우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도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18절)라는 말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을 주시고 아들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써 충만의 세계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 곧 충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것이 너무 작다고만 생각합니다. 신자면서 왜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세계보다는 보이는 세계에 더 집착하기 때문이고, 보이는 세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세계의 존귀함과 그 가치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0대, 40대의 현재의 자신을 생각하지 마시고, 70대, 80대의 자신을 미리 당겨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 훗날의 모습이 아닙니다. 금방 여러분께 다가올 현실입니다. 그 현실을 당겨서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 내일이 마지막일지 알 수 없는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에게 세상의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호화로운 집이나 많은 돈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육신은 편할지 몰라도 세상을 떠난 다음의 일을 생각한다면, 신자에게 예수님은 인생의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가볍게 여기고 놓치면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집중되기 때문에 예수 안에 충만이라는 복된 세계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충만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믿고 충만해지는 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거짓 선생들의 복음이었습니다. 사도의 복음은 예수 안에 완성된 충만의 세계를 증거하는 반면에, 거짓 선생은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의 것으로 충만해지는 복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말은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을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그것이 뭔가 하면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진 화평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 사도가 말하는 모든 충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원수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이 관계를 완화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끼리 원수된 관계는 어느 한쪽의 노력으로 그 관계가 완화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수가 친구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그 어떤 노력으로도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가 되게 한 죄를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가 예수님의 피로 인해 화목의 관계로 뒤바뀐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화목은 하나님 앞에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을 받은 것을 뜻합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그로 인해서 생명을 잃어버린 채 영원한 저주에 갇히게 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고 복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 안에서 충만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의 신자에게는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기도를 안하고 성경도 안봅니다’라는 자책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온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가 기도하고 성경 보는 열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아들이 흘린 피를 보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열심으로 자기 믿음을 좀 더 좋은 믿음으로 만들려고 하고, 자신의 좋은 믿음을 근거로 해서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의 거짓 선생들이 말하는 할례를 하고 절기를 지키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는 말에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 받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이미 이루어진 복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세움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악함을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것이고 예수님의 의를 믿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열심히 노력해서 더 좋은 믿음이 될 것을 요구받는 것은 예수 안에서는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사하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써 기뻐하고 그 기쁨으로 인해 충만한 세계를 누리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23절을 보면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화목이 되심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세움 받았다는 복음이 소망이 되어야 하고, 그 복음에서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럴 때 거짓 선생들의 미혹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함을 보면서 행함이 적어서 자기 믿음을 의심하고, 그래서 더 나은 믿음이 되기 위해 열심히 실천해야 한다고 여기는 비복음의 생각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는 깨끗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힘쓰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흠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안의 세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흠이 없고 깨끗하다’는 자랑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흠 없는 자로 여김 받는 자신을 자랑할 자가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자로 세우시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자랑하고 감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아는 신자입니다.

 

 

은혜를 자랑하고 감사하는 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살아가는 삶이 세상의 것으로 부족함을 느끼는 것보다는 예수 안에서 충만한 세계를 사는 신자답게 주어진 것에서 감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예수님으로 감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도 모르게 원망이 나오게 되고, 믿지 않는데도 자신보다 잘 사는 사람을 보게 되면 하박국과 같은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신자를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하신 그 일을 보게 합니다. 그렇게 하셔서 견디기 힘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소망이 주께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그 순간이 주의 말씀과 복음이 귀로와 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깨달음이 계속 지속되지 못합니다. 여전히 보이는 것으로 인해서 흔들리는 인간은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붙드시면서 예수 안에 있게 하십니다. 신자의 신자 됨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충만이라는 복음이 우리의 소망이 되고, 그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를 믿는 믿음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일하고 계시고,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복음의 세계로 인도받을 수 있다면, 신자가 주를 바라보고 그 주로 감사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 안의 충만의 세계를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이 없다고 해도 그것이 부족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예수님이 충만으로 다가오는 그런 복음의 세계를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왜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복된 자인가를 알고, 그 앎이 여러분을 믿음의 기쁨과 감사를 증거하는 삶으로 인도해 감으로써 믿음의 증거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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