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010.03.15 00:10

(12강) 그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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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2:6-7http://onlycross.net/videos/Colossians/col-02060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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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설교>

‘동물농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보통의 애완견과는 다른 사나운 행동을 보인 애완견을 개 훈련의 전문가가 등장하여 사나운 행동을 교정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행동을 교정하여 애완견답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이러한 ‘행동교정’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자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신앙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며,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버리고 신자다운 행동으로 교정함으로써 신앙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표방하는 말들은 항상 인간의 행동을 앞세웁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는 행동을 교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의 복음이 행동 교정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행동이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는 비 복음적인 것이라면, 바울은 아마 ‘그것은 복음이 아니니까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고 권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와 절기를 요구하는 거짓 선생들의 말에 대해 할례와 절기를 지키지 않는 것이 복음이라는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할례와 절기를 지키고 지키지 않는 행위에 신앙의 기준을 두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1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고,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의 화목이 되시고 신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의 행함으로 인해서 이미 화목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또 다시 인간이 행동을 교정하고 실천을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이 행하신 의의 일을 보지 않는 것이고, 주 안에 있지 않은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행동을 교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즉 골로새 교회의 문제는 행동을 교정하여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에 대해 참된 감사가 있게 되면 자연히 해결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면 ‘할례를 행해야 믿음이다’는 식의 말들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할례를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라고 한다면 그 말 역시 복음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은 할례를 행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고 할례를 행하여 신자답게 되고자 하는 그 생각이 잘못임을 말합니다.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6,7절)고 말합니다.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믿었으니’라고 말하기보다는 ‘주로 받았으니’라는 표현을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주가 거짓 선생들의 주와 다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도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 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만약 다른 예수 위에 세워졌다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모이고 예배를 드리고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다고 해서 교회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터가 되어 그 위에 세워져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합니다.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앞세운 종교모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임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모든 교회는 자기들이야 말로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선교와 구제 등 교회가 행하는 여러 가지의 사업을 내세울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다른 교회와는 다르다는 것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헌금을 강요하지 않고 목사가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 등을 내세우면서 우리야 말로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참된 교회임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헌금을 강요하든 강요하지 않든 그것이 교회됨의 증거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됨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증거될 뿐인데, 헌금을 강요하지 않고 목사가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 것 등은 사실 성령의 역사와 무관하게 목사의 목회 철학과 신념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성령으로만 나타나게 되어 있고, 이 교회는 지상에 세워진 제도적인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무리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제도를 만들어 그 제도에 따라 운영을 한다고 해도 인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지도 세워질 수도 없습니다.

 

 

골 1:23절을 보면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터는 바울이 전한 복음, 즉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골로새 교회가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 말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책망하면서 부숴버립니다. 보이는 형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상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인도하고 의지했던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죽은 것으로 여기고 의지할 대상이 사라진 것에 대한 불안감을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대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가 자신들을 평안의 삶으로 인도해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내가 원하는 인생으로 인도받기 받기 위해서 의지하는 그것이 곧 우상인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예수님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켜주고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하면서 예수를 믿으면 원하는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인간이 상상하고 원하고 기대하는 예수로 만들어 놓고 ‘이것이 예수다’라고 하면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한 주가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하면 신자는 이미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의 귀한 피로 인해서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에게 이미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아들의 나라로 가기 위해 실천해야 할 것이 없고, 하나님 앞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 받기 위해 행동을 고치고 실천해야 할 것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함이 의가 되어 의와 복이 될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바울의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바울이 전한 예수님을 주로 받았습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를 주로 받았을 때 그 안에서 행할 때 나타나는 열매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도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를 주로 받은 신자라면 그 안에서 주가 행하신 일을 보게 됩니다. 주가 행하신 일은 앞서 말한 대로 신자에게 하나님과의 화목과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 받는 복으로 다가옵니다. 신자의 행함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행하심이 나의 의가 되어 죄 없다는 선언을 받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법칙과 질서에서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로 받은 신자가 그 안에서 행할 것은 주의 행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만약 인간의 선으로 악을 덮는 방식이라면 선을 행하는 자기 자랑과 과시가 앞설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것입니다. 복음에서 자기 과시와 자랑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감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사도가 전한 예수를 주로 받은 증거입니다. 신자가 바울이 전한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었다면, 그리고 복음을 따라 행한다면 감사함이 넘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삶의 어려움과 힘겨움에서도 예수님 안에서 변함없이 주를 바라보고 신뢰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실천과 행함으로 요구하고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신앙다운 것으로 여기며 그것이 복이 된다는 다른 복음은 인간에게는 수고와 짐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고 그 안에 있다는 것이 기적이며 복인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기적과 복을 구하는 것은 신자를 더욱 깊은 실망으로 밀어 넣을 뿐입니다.

 

 

신자는 구원의 문제로 불안해하는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복을 받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신자는 예수 안에서 이미 충만으로 거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충만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자로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넘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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