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010.05.03 09:27

(19강) 그리스도의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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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3:15-17http://onlycross.net/videos/Colossians/col-03151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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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5-17)

 

 

<설교>

‘평강’이라는 단어에서 대개 생각하는 것은 분란과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평강’이라는 말도 교인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친하게 잘 지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준의 평강은 굳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할 필요 없이 우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격과 도덕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함으로써 나타나는 평강은 외적으로 사이좋은 관계와는 무관합니다. 평강이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맞지만, 여기서 말하는 분쟁은 외적으로 싸우고 다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외적으로는 다툼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에 누군가에 대한 불만과 미움이 자리한다면 이미 분란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한 몸의 관계의 특징은 지체가 서로를 평가하고 서로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를 평가하기를 좋아하고,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불만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친한 척 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잘하는 위선입니다.

 

 

위선적인 인간이 모여서 속마음을 감추고 예의를 갖추어 대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진실된 것이겠습니까? 이처럼 겉은 평강이지만 속은 분쟁이 난무하는 것이 인간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현대 교회는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오히려 분쟁으로 교인들을 밀어 넣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복의 문제를 모두 현실적인 것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을 얘기하면 자연히 복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로 나뉘게 됩니다. 잘 사는 사람은 복 받은 자로, 못사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 자로 나뉩니다. 그리고 복을 받은 것은 믿음과 연결되기 때문에 잘 사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공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식 아래서 하나님의 공평과 그리스도의 평강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서 이것을 보고 있습니다. 할례를 행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게 되면 할례를 행한 사람의 눈에 할례를 행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됩니다. ‘나는 믿음이 있고 너는 믿음이 없다’는 이런 식의 평가가 한 몸의 교회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고, 평강은 사라지고 분쟁만 남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외적인 것에 관심을 두다 보니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됨에 대해서는 소홀 합니다. 교회가 아무런 문제없이 조용하고 부흥되면 그것으로 만족해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진 교회가 나타내고 증거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전도하고 선교하면 복음에 대한 교회의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의 교회됨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 채 전도하고 선교 한다면 결국 기독교라는 종교적 실천으로 끝날 것입니다.

 

 

교회는 한 몸이라고 하고 한 몸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맺어진 관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셔서 몸을 다스리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로 맺어진 관계에서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베푸신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열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의 수준에 따라서 각기 다른 열매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가 있고 조금 못한 열매가 있지 않습니다. 동일한 은혜로 말미암아 동일한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리고 그 신자가 함께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 받은 것으로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 모든 사람은 저주에 갇힌 자입니다. 동일하게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하는 인간으로만 그리스도께 나옵니다. 착한 행동을 하며 살았던 사람이나, 악한 행동을 했던 사람이나 그리스도 앞에서는 사망에 속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고 인간됨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앞에 모인 자리에서는 구별도 차별도 불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평강입니다.

 

 

현대 교회는 교인들을 믿음이 좋은 사람과 좋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교회가 요구하는 실천을 하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실천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치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 받는다고 소리칩니다. 이러한 말이 성경을 멋대로 왜곡하고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악한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까? 무엇으로 그것을 구분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좋다 나쁘다를 따지기 전에 믿음이 누구의 것인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현재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있다고 해도 그 믿음은 여러분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모든 신자는 동일합니다. 물론 믿음으로 사는 모습은 다르고, 그 열매 또한 동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낫고 열매가 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여러분의 힘이 아니라 믿음이 역사한 결과입니다. 여러분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자는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잘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없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께 나온 신자입니다.

 

 

설사 다른 사람보다 많은 땅의 것을 가졌다고 해도 그리스도로 인한 영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것으로도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설물에 지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믿음으로 함께 하기 때문에 차별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이 곧 교회의 평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사는 신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사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본문에서 매 구절마다 감사를 언급합니다. 감사는 나를 다스리고 주장하시는 분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한시도 내 힘으로 산 적은 없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고 있음을 알 때 가능한 것이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이 복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가난이라는 자리에서 멸망이 당연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다스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가난이라는 여건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감사의 대상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입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 즉 감사의 대상을 마음에 두지 않는 신자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게 됩니다. 열심히 기도했더니 응답을 받았다고 하고, 어려운 형편에 십일조를 철저히 했더니 복을 받았다고 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었더니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든 원인과 결과를 자신에게 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감사는 감사의 대상이 없는 형식적인 감사로 그칩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형편에서는 감사할 수 없게 됩니다.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차별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복을 받은 원인을 자신의 정성과 노력의 결과로 보기 때문에 자연히 복을 받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열심과 노력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차별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가 붙들어 주심으로 삽니다. 믿음 역시 그리스도가 우리를 붙들어 주심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주를 붙들고 사는 것은 없습니다. 행함의 문제 역시 그리스도 밖에서는 행함의 수준과 정도를 따지고 인간을 평가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행함이 있느냐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힘없는 자로 여김 받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공평하신 의입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로 되어진 은혜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개입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회는 공평하신 의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 함께 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인간의 수고는 존재하지 않고 은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를 주장함으로써 가능한 교회의 평강입니다.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한다면 우리는 그 말씀으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르치고 내가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말씀이 피차 가르치는 것이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그 말씀으로 인해 자신이 먼저 가르침과 권면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목사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가르침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목사가 가르치는 교회라면 거기에는 이미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라는 차별이 있습니다. 한 몸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몸의 관계에 있는 지체를 세워서 그를 도구 삼아 우리를 가르치고 권면하신다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린아이를 통해서도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어린 사람이 건방지게 어른을 가르치려 한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이 역시 세상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시각일 뿐입니다.

 

 

17절을 보면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는 것처럼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서는 비방이 나온 적이 없고 차별도 없으며 자기 영광을 위해 하신 것이 없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으로 모인다면 무엇을 해도 인간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차별과 무시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나타내고 증거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베푸신 것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고 오직 그것을 증거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새 사람 된 신자로 모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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