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2010.12.12 16:54

(7강) 미쁘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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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 3:1-5http://onlycross.net/videos/2the/2the-03010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4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설교>

 

예수님이 오시면 사람들이 마음껏 놀던 세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참된 세상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세상은 무엇이 허상이고 무엇이 실상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인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가 감추어져 있었고 그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 자신들의 무지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은 지금의 세상은 도무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입니다. 재림을 믿는다면 세상 또한 사라질 것을 믿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신자는 세상에서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세상을 심판하실 때 내 것만 달랑 남겨 놓으시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애당초 내 것이라고 우길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에 내 것을 남겨 놓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재림과 상관없이 산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재림을 믿는다는 말은 하되 재림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준비하신 세계보다는 육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한 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속성을 깨뜨리시고 그 속에 천국 백성의 속성을 집어넣으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이 주의 미쁘심입니다.

 

 

3절에 보면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고 말합니다. 미쁘시다는 것은 진실과 신실을 의미합니다. 진실하시고 신실하신 주께서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면서 우리가 천국 백성의 속성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신다는 것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이 주가 굳건하게 하시고 지켜주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주가 나서서 굳건히 해주시고 지켜주셔야만 하는 위험한 곳입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나를 위한 곳으로 보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일이 나를 중심으로 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깨어질 곳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도 세상에서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을 달라고만 합니다.

 

 

세상은 돈 가지고 노는 곳입니다. 자연히 돈이 많은 사람이 큰소리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나라에서도 큰소리치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본향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작심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에 취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실상을 아는 사도는 다릅니다. 1,2절을 보면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사도는 무엇 때문에 기도를 부탁하는 것일까요? 사도보다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기도가 더 힘이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도 개인의 기도보다는 교회가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더 힘이 있어서일까요?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힘을 모으면 하나님의 응답도 받아낼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한 사람보다는 열 사람의 기도가 더 세고, 열 사람보다는 백 사람의 기도가 더 세다는 세상의 힘의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가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사도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교회에 알게 함으로써, 사도가 원하는 것을 함께 원하고 사도와 같은 마음으로 주를 바라보자는 취지에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3절)는 말을 이어서 하는 것입니다. 사도와 같은 마음이 아니고서는 우리를 굳건히 하시고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는 것이 주의 미쁘심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의 미쁘심은 육신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의 미쁘심이 육신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에 계속된 핍박과 환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주의 일이 됩니다. 다만 주께 죄를 범한 징벌의 차원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더 극심해진 핍박과 환난에서 주의 사랑, 은혜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기도를 부탁하는 말을 하면서 미쁘신 주의 일이 우리를 굳건하게 하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는 것임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의 기도에서 우리는 사도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염두를 두어야 합니다. 사도가 만약 우리와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봤다면 본문과 같은 기도를 부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의 기도는 세상에서 자기 것으로 자신을 굳건히 세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 밖의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상상할 수도 없고 우물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릅니다. 우물 밖의 세상을 알려면 우물 밖의 세상을 경험한 다른 개구리가 들어와서 얘기를 해주는 길 밖에 없습니다. 사도가 지금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보지 못한 다른 세계를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를 통해서 다른 세계에 대한 눈을 뜰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물 안의 세계만 전부로 여기는 개구리가 우물 밖의 세계에 대한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사도가 전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세상의 실체도 전부도 아닙니다. 우리 눈에는 세상이 돈만 있으면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보이지만 사도에게 세상은 악한 자가 역사하는 곳이었습니다. 신자를 미혹하고 복음을 방해하는 사탄의 활동이 극심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이기에 주가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건져주지 않으면 안되는 곳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역사가 없으면 안되는 세상을 신자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신자의 승리는 주의 인도하심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신자의 승리는 미혹과 핍박과 환난이 계속되는 세상에서 끝까지 주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심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깨닫고 핍박과 환난에서도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내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현실에 속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자신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보이는 세상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사도의 기도는 실감 있는 생생한 기도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실감있는 생생한 기도라면 사업이 잘되고, 수능 점수 잘나오게 해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것이 생생한 현실의 문제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현실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세상은 완전히 깨어집니다. 세상에서 즐기고 기뻐하고 자랑하던 모든 것들은 여름 햇살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일어날 참된 현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이러한 참된 현실에 맞추어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약속의 말씀 아래서 주의 미쁘심을 생각한다면 미쁘신 주께서 우리에게 왜 함께 하셔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주어진 환경과 상관없이 주를 바라보며 주의 도우심과 붙드심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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