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2010.12.19 18:56

(8강) 떠나라

조회 수 471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살후 3:6-18http://onlycross.net/videos/2the/2the-03061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설교>

인간관계에는 만남과 떠남이 반복됩니다. 좋아서 만나기도 하고 싫어서 떠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싫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만나는 것도 있고, 좋아하지만 할 수 없이 떠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에게도 떠나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가 본문에서 언급합니다.

 

 

6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이 같은 내용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로서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아주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백성이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주의 뜻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할 정도면 교회에 해를 끼치는 아주 악한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재림론을 가지고 신자를 미혹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나, 현대 교회가 경계하고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바울이 경계하면서 떠나라고 하는 그 대상은 사도의 말대로 하면 게으르게 행하고 사도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않은 모든 형제들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사도가 말한 이들이 진심으로 신자가 함께 하지 말고 떠나야 할 악한 자라는 느낌으로 다가옵니까?

 

 

사실 우리에게는 사도가 말한 이들이 떠나야 할 악한 자라는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게으르고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사도의 말에 담겨 있는 심각성을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십자가의 복음을 훼손하고 무너뜨리는 비 복음적이고 비 성경적인 말들로 가득한데도 그 말의 심각성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예수를 좇는 이유가 육신의 이익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든 복음이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의 욕망에 부합되는 말이면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이 안고 있는 심각성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합니다. 즉 모세를 세워서 이루신 출애굽을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재현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분명 떠나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떠나야 할 그것이 무엇인가는 사도의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사도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스스로 수고하며 일하여 음식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즉 먹을 것을 교회로부터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그렇게 한 이유는 9절에서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도로서의 권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도 되는 권리로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본을 보인 것은 스스로 수고하여 일하며 복음을 전한 ‘자비량 선교’가 아니라 사도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도 되는 권리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목사가 목사라는 위치를 교회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으로 여긴다면 사도의 본을 받지 않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목사에게 복음을 원한다면 목사는 복음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사의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 육신을 위해 복음을 감추고 가공하면서 사람들의 귀에 즐거운 말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곧 교회에 폐를 끼치는 것이 되고, 그것은 게으름에 해당됩니다. 설사 교회가 복음을 원치 않는다고 해도 신자의 생명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목사의 봉사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을 위해 타인에게 폐를 끼쳐도 된다는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괴로움의 결과가 예상된다고 해도 타인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사도가 가르친 전통대로 행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정신이며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죽으시는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며 복음이 안고 있는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서의 신자의 관계에는 그 어떤 권리 주장도 없게 됩니다. 목사라는 권리, 장로라는 권리, 권사 집사라는 권리 주장이 없게 됩니다. 오직 서로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는 관계로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런 관계에서 자기 편함이나 권리로 인해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게으르고 사도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은 인간관계를 끊고 아예 상종도 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그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라는 말도 세상이 말하는 노동과 그 대가의 관계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복음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노동에 대한 세상의 시각으로 본다면 일하지 않은 사람은 먹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노동의 원칙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노동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편한 인생이 약속된 것이 아니라 수고하여 먹고 살 수밖에 인생이 죄의 몫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예수를 믿으면 평안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평안의 인생을 사는 것은 사람이 원하는 소망입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보다는 평안을 누리는 인생의 행복을 꿈꿉니다. 이것이 일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이것은 인간이 죄 가운데 있는 존재임을 잊고 있는 것이 됩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재림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가르치는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재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수고하고 일하는 세상일을 의미 없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가 행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면서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고방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사탄이 활동하는 세상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자기 한 몸 편히 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안일한 생각으로 자신의 편함만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사람과의 관계는 단절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안일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으로는 생명의 세계를 맛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4,15절을 보면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말대로 하면 신자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듣기 좋은 아첨의 말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 대해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함께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안일을 추구하고, 편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고생하는 것도 복음 안에서는 마땅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평강을 찾을 것이고 예수님이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099
2010.12.19 » 데살로니가후서 (8강) 떠나라 신윤식 4718
2010.12.12 7 데살로니가후서 (7강) 미쁘신 주 신윤식 4661
2010.12.05 6 데살로니가후서 (6강) 전통을 지키라 신윤식 4819
2010.11.28 5 데살로니가후서 (5강) 거짓 것을 믿음 신윤식 4893
2010.11.22 4 데살로니가후서 (4강) 불법의 사람 신윤식 5003
2010.11.15 3 데살로니가후서 (3강) 강림과 영광 신윤식 4751
2010.11.08 2 데살로니가후서 (2강) 하나님의 공의 신윤식 4928
2010.11.01 1 데살로니가후서 (1강) 사도의 자랑 신윤식 4500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