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09.12.29 08:56

(69강) 복음으로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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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0:34-39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0343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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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4-39  개정)


<설교>
당황스러운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전혀 당황스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무작정 믿는 맹신도이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에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내용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당장 본문의 말씀이 그에 해당됩니다. 과연 어느 종교의 신이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말을 합니까? 어떤 신이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기 위해 왔다는 말을 합니까? 도대체 어떤 신이 부모나 자식보다 신을 더 사랑하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합니까?
이러한 예수가 성탄절에 여기저기서 떠들고 있는 사랑과 평화의 예수와 동일한 예수이기는 한 것일까요? 정말 예수님이 세상이 떠드는 사랑과 평화를 위한 예수로 오셨다면 본문과 같은 말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본문만이 아니라 복음서에 그려진 예수님의 인물 됨됨이는 세상이 상상해온 예수나, 영화 속에 표현된 성품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다분히 독단적이고 위협적이며 권력자를 연상케 하는 언행을 거침없이 사용하여 도무지 인자하거나 후덕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또 마 19:29절의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을 보면 마치 영생을 받으려면 모든 재산을 버리고 부모 형제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이비 교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본문과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훌륭한 가르침으로 채택할만한 말씀도 많이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이 그런 내용입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예수님도 그 내용 그대로 실천하지 않으신 것이 있다면서 예수라는 사람은 실천은 없고 말만 있는 존재라는 비난이 있기도 합니다.


가령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실재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대제사장에게 끌려 왔을 때 제사장의 말에 공손히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는지 종에게 뺨을 맞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의 산상수훈 설교대로 다른 뺨을 돌려 댄 것이 아니라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요 18:23)라고 항의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말도 스스로 실천하지 못하는 예수는 사랑과 용서와 자비의 예수가 아니라 배타와 독선으로 가득한 존재였을 뿐이라는 것이 성경의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평가하는 세상의 시각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도 세상의 그러한 시각에 편중해서 본문과 같은 윤리와 도덕을 벗어난 말씀에 대해서는 불편해하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말씀을 생명의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대개 생각하는 생명의 진리의 말씀은 평안과, 기쁨과, 복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요? 평안과 기쁨은커녕 오히려 불편함과 당황스러움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화평이 아니라 검

예수님의 말씀에 신자가 핍박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싶어 하는 형통, 축복, 은혜, 능력, 성공 같은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복음의  길을 가는 신자가 받을 보상으로 34절에 세상과 화평 하는 대신 분쟁을, 35-37절에 가족 간 화목 대신에 불화를, 38절에 평안 대신 고통을, 급기야 39절에는 생명 대신에 죽음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커녕 정 반대의 것들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당황스럽고 불편하다면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웃과 화평하고 가족끼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는 그런 행복을 도무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황스럽고 불편한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덮어 버리고 싶고, 밀쳐 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이고, 또 애초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원하고 꿈꾸는 인생이 무너짐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시는 분으로 오셨을까요? 마 5:9절을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화평케 하는 자를 복 있는 자로 말씀합니다. 즉 화평케 하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롬 14:19절에서도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신자가 힘써야 할 일에는 화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까? 신자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신자 역시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실 화평을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은 엡 2:14-15절의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세상이 원하는 화평과 예수님이 주시는 화평이 다를 뿐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화평은 인간의 결속입니다. 서로 가족 같은 관계가 되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 인간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을 이루어 주는 맞춤형 예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 현대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도우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고 기독교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결속을 깨뜨리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는 말씀의 의미도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가 달라서 가족과 실제 원수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혈족관계까지 예수님은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만 합니까? 인간의 결속을 인정해 주시며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라고 하는 것이 더 예수님다운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것은 결국 세상에서의 인간의 행복을 위해 오신 예수로 존재해 달라는 요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싫은 것입니다. 자신의 관심과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과의 죄의 관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해 주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 보낸다는 것은 독선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한다고 해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도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여느 종교의 신처럼 인간의 화목을 가르치고 세계 평화를 가르치면 다른 신과 똑같은 신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끼리의 관용은 사랑도 화목도 아닙니다.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말고 모두 나름대로의 진리를 추구하는 같은 종교로 존재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예수님의 정신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야 말로 착함을 가장한 사단의 계략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 속의 신자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살기를 원합니다. 주변의 사람도 세상이 돌아가는 것도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도 교회도 모두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야 옳다고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37,38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부모 자식관계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에게 자식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화목하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모 자식의 관계보다 더 존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에 머무는 부모라면 자식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쳐주고 자식에게 세상의 성공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힘쓰는 것이 진심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은 항상 세상에서 배타적인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세상이 이런 복음을 영접하겠습니까? 세상은 이런 복음은 원하지 않습니다. 말이 안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세상이 거부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러한 복음을 영접한 자로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신자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산다는 것은 평탄한 길이 아니고 환영받는 길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말씀처럼 자기 목숨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몇 발자국 가다가 되돌아서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복음에 붙들려서 말씀의 지시를 받고 살아가는 신자는 자기 목숨을 얻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잃는다고 해도 이미 마음에 박혀 버린 생명의 길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고 생명이 되는 복음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능력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으로 외로운 자리였습니다.  결국 자기 목숨을 위해 모두 예수님에게서 도망을 쳐버리고,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성령이 복음의 자리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신 외로움의 길을 가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되고,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고, 부모보다 자식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다만 외로움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가진 자로 세상에 보냄 받은 신자에게 주어지는 형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외로움의 자리에 자기 백성을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32,33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묻겠습니다.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사람 앞에서 시인할 수 있겠습니까?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시인할 때 세상은 전혀 다르고 생소한 예수님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할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예수를 시인하시겠습니까? 그것이 복음에 이끌려 사는 신자입니다. 복음이 신자를 이러한 길로 이끌어 왔고 또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우리가 눈치 채지 못했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을 붙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비방을 받는 길을 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길로 일 년간 이끌어 오셨고 또 2010년도 이 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길에서 복음의 쓴맛을 경험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감사가 있다면 그 기적을 어디서 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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