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8.30 15:40

(102강) 칠병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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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5:32-39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5323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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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설교>

 

◎ 각기 다른 두 이적 ◎

 

예수님께서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남자만 사천 명이 되는 무리들을 먹이신 이적은 14장의 오병이어 이적과 거의 흡사합니다. 이런 이유로 마태가 동일한 이적을 두 번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함으로 인한 오해입니다.

 

 

만약 마태가 같은 이적을 두 번 기록한 것이라면 마태는 두 이적의 사건중 하나는 조작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 이적과 본문의 칠병이어 이적에 등장하는 숫자와 내용에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예수님이 먹이신 무리의 숫자가 다르고, 먹고 남은 것을 거둔 광주리 수가 다르고, 먹이신 떡의 수가 다릅니다. 그리고 이적의 장소도 다르고, 그 대상 또한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오병이어는 유대인들이 대상이었고, 칠병이어는 이방인들이 대상이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이적은 동일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매우 적은 양의 떡과 생선으로 수천 명의 사람을 먹이셨다는 부분에서는 동일하지만 두 이적이 갖고 있는 의미와 이적을 행한 목적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이적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두 이적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이적의 다른 점은 숫자의 차이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병이어는 제자들이 먼저 무리들이 밥을 먹지 못한 것을 보고 마을로 보내어 먹을 것을 사먹게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먹지 못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오병이어 이적에서는 무리들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제시를 하고 있지만, 본문에서의 제자들은 자신들은 무리들을 먹일 수 없음을 말할 뿐, 그 어떤 방법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다른 점에 중점을 두고 본문을 이해한다면 오병이어 이적이 증거하는 예수님과는 다른 의미의 예수님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결국 두 이적은 매우 흡사하다는 것 때문에 동일한 이적으로 오해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이적을 행하신 의미와 목적에 있어서 각기 다른 이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 칠병이어 이적의 의미 ◎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앉으시고, 큰 무리들이 데리고 온 장애인들을 고쳐주신 후에 본문의 칠병이어 이적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33절에서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칠병이어의 이적은 산이 아니라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산에서 장애인을 고쳐주신 후에 산에서 내려 오셨고 무리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셨을까요? 산에서 하신 일은 무리들이 데리고 온 장애인을 고쳐주신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산에 올라가실 필요 없이 갈릴리 호숫가에만 계셔도 무리들이 예수님께 장애인을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장애인을 고쳐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 오셨는가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산에 올라가셔서 장애인들을 고쳐주신 것이고, 이어서 광야에서 행하신 칠병이어 이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구약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성경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산에서 장애인을 고쳐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불러 율법을 주신 것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고, 율법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즉 율법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 인간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본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증거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준 높은 정결법을 만들고 정결 의식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본래 인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산에서 받은 율법 앞에서 인간은 영원한 장애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장애인의 세계에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산에서 장애인을 고치신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장애인과 같은 상태에 있는 인간을 무엇으로 고치십니까? 그것은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입니다.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칠병이어 이적입니다.

 

 

인간이 고침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고,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가 인간을 고치시는 것이라면, 인간은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자비만 바라보고 의지하면 됩니다. 자신이 고침 받기 위해서 스스로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는 신자입니다.

 

 

칠병이어는 그 배경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광야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아 산에서 내려온 순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광야를 배경으로 본문을 보게 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온전히 드러내시고 이루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증거하는 것이 칠병이어 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칠병이어 이적은 오병이어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32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은 사흘 동안 먹지 못해 길에서 기진할 수도 있는 무리들의 실상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먹지 못해서 굶주리고 있는 인간의 실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예수님은 가난하여 먹지 못한 사람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 오신 분으로 해석을 해야 하고, 그러한 예수는 양식이 풍부하여 배부른 사람과는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인간의 실상은 그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참된 양식이 없어서 길에서 기진할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에서 지치고 기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혼의 배부름을 얻지 못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을 손에 쥐기 위해 살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실상을 불쌍히 여기시고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증거된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을 칠병이어 이적으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드러납니다. 즉 독생자의 몸과 피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자비고 긍휼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병이어 때처럼 자신들이 나서서 무리를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제자들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여전히 무리들을 먹일 수 있는 자신들만의 방법을 제시했다면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잊고 있거나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제자들이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33절)라고 말하는 것은, ‘배고픈 무리를 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라는 고백이 포함된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입니다.

 

 

◎ 칠병이어 이적과 신자 ◎

 

 

사실 오병이어나 칠병이어 기적은 몇 개의 떡과 생선으로 수천 명의 무리를 배불리 먹였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지 그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병자나 장애인이 고침 받는 기적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천 명의 무리가 배불리 먹기는 했지만 그들이 먹은 것은 결국 맛없는 떡과 생선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배불리 먹기는 했지만 결국 배는 다시 고플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 이적을 육신의 배를 부르게 해주는 예수님으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은 맛없는 떡과 생선으로 배부른 것에 만족해 하지 않습니다. 단지 배부른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배부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었던 맛없는 떡이 예수님의 손을 거쳐서 아주 맛있는 케이크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그 어떤 은혜를 베풀어도 만족함을 얻지 못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감사와 기쁨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곧 사흘 동안 먹지 못해 길에서 기진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상이라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그런 존재로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먹지 못해 길에서 기진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이 없고, 채워짐이 없고, 항상 부족함과 아쉬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으되 남편에 대해서나 아내에 대해서 만족함이 없습니다. 하루 세끼 양식을 먹으며 육신이 배부르고 자식도 먹이며 살아가지만 역시 만족함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게 하는 돈도 있지만 그 또한 만족함이 없습니다. 넉넉하다는 마음은 없고 좀 더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만 갖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 갖고, 더 채우기 위해서 살다보니 삶이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고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사흘 동안 먹지 못해 굶주린 자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배부르게 먹이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배부르게 하심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먹지 못해 굶주리고 길에서 기진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칠병이어 기적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로 전락될 뿐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배고픔은 육신과 연관된 세상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적인 면에서도 배고픔을 느낍니다. 좀 더 신앙인답게 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좀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끌어 내기 위해 먼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고, 그것은 인간의 열심으로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무엇으로 자신의 배고픔을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 무엇으로도 배부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구하는 모든 것은 참된 양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내 힘으로 나를 채우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채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채운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배고픔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상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이라면, 그분께서 나눠주신 것은 인간을 배부르게 하는 참된 양식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참된 양식으로 오셨고, 그것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세상은 이런 얘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자비 또한 인간의 삶을 돕고 지켜주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인간이 왜 불쌍한 존재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쌍함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채워지고 그것으로 만족함을 얻으며, 그 만족으로 행복을 누리는 삶에만 관심을 둡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정상적이지 못한 장애인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자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베푸신 것으로는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배고파하며 살아야 하는 불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볼 수 있다면, 불쌍한 우리를 배부르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신 것도 자기 백성을 이러한 신자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세계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항상 세상으로만 향합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서 예수님의 세계로 붙들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자비하심입니다.

 

 

 신자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고, 그 사랑이 참된 양식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알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신자는 배부름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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