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8.07 20:35

(64강) 달음질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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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원고>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지극히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을 깊이 해석하는 것을 싫어하고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살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간단하면서도 자신에게 실용적이라고 생각되는 말을 선호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잘 알고 있기에 달리 알고 배워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러한 형태의 신앙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인류 역사와 함께 흘러 내려온 자기중심적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도무지 성경적이고 신앙적이라고 할 수 없는 말들도 신앙이라는 옷을 걸치고 버젓이 외쳐지고 있습니다. 가령하나님으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는 구절을 표어로 삼은 교회가 많습니다. 62:7절을 인용한 것인데 표어의 의미는 뻔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쉬지 않고 일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종 부리듯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시고 기도하지 않으면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야 말로 성경으로부터 아예 벗어나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뜻인 것처럼 동조하면서 하나님을 쉬지 않게 하겠다며 기도하는 횟수나 시간을 늘리기도 합니다.

 

 

62:7절을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으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일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절박함을하나님으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떼를 쓰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재건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바라볼 것을 촉구하는 의미의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24절의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는 말을 대개 어떻게 이해합니까?

 

 

단편적인 믿음 아래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살면 모든 것이 잘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상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달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합니다. 열심히 달리면 결승점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천국만 바라보는 것을 게으른 신앙으로 타박하면서 일어나서 천국을 향해 달음질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전심전력을 다한 필사적인 달음질을 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러한 말을 편들어 주는 것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3:13-14절의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12:1절의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는 내용도 신앙생활을 경주, 즉 달음질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구절을 근거로 소위 달음질하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에서 필히 따라오는 것은 경쟁입니다. 바울은 다 달릴지라도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달리는 사람들 틈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하는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향해 함께 달리면서도 이겨야 하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교회일까요?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은 지금 상 받기 위한 신앙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8장에서 시작된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가 10장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9장의 내용은 우상 제물을 먹고 먹지 않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상 받는 신앙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상 제물 문제를 통해서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신자의 자유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사실 달리는 경주에서 1등은 하나입니다. 2, 3등도 있고 그들이 받는 상도 있지만 1등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상 받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는 것은 1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1등이 되도록 달음질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편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야 말로 세상에 통용되는 원칙과 사고방식을 따른 것으로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의 시각에서는 합리적인 해석 같지만 믿음은 팽개치고 인간의 행함 문제에 충실한 해석일 뿐입니다.

 

 

바울은 25절에서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말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는 달음질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달음질을 하지 않는다면 이기기를 다툴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것을 연결해 보면 달음질하는 사람은 이기기 위해서 모든 일에 절제하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절제 하는 자들은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이기기 위해서 좋아하는 것을 멀리해야 할 때가 있고 하고 싶은 것도 참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경쟁 속에 있는 세상은 그렇게 절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의 승리를 위한 절제이기도 얼마든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아마 여러분도 절제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절제가 있습니다. 자기의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 절제의 한 예입니다. 바울의 절제는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 썩어질 육체의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썩지 않은 것에 참여되기 위한 절제입니다.

 

 

이것이 26절에서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말하는 것처럼 분명한 목표가 있는 달음질입니다. 썩지 아니할 것이 바울의 달음질하는 이유였고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길까요? 썩을 승리자의 관일까요 썩지 아니할 것일까요? 당연히 우리의 마음은 썩을 승리자의 관으로 끌립니다. 왜냐하면 썩을 것이라 해도 그것이 육체로 사는 인생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고 이기기를 다투며 절제 한다 해도 결국 그 목표는 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닌 바로 나의 승리를 인생의 목표와 방향으로 삼고 달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달음질의 끝은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것이기 때문에 목표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것을 목표로 달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영원한 것이 목표라고 하면서도 정작 썩어질 면류관을 얻고자 달리는 것이 우리의 실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7절에서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표가 자신이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라면 바울의 복음은 자기를 위한 것이 되고 앞에서의 모든 말을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하나님께 버림당하는 것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위해 달렸을 때입니다. 즉 자기를 위해 달리는 것이고 자기를 위해 달린다는 것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복음을 위해 살자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인간의 행함과 열심에 의해 구원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에서 생각할 것은 이것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기독교인에게 바울은 특별한 인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도에 비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업적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구원은 당연하게 여기는 시각이 많습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자신을 본다면 어떨까요? 자신에게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구원 받을 만한 업적이나 행위, 열심이 있는가를 살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크고 좋은 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여러 일에 자신의 열심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해 이기기를 다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했다는 것은 바울이 무엇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뜻일까요?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자기 행위, 업적입니다. 복음을 전파한 자신에게 초점을 두었다면나는 구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어떤 행위도 구원의 근거나 이유가 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는 말에 담긴 바울의 심정입니다. 따라서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자신이 복음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말은 바울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해석일 뿐입니다.

 

 

바울의 말에서 드러난 것은 평소에 자기의 이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본색입니다. 이 본색이 우상 제물의 문제에서도 드러난 것입니다. 만약 우상 제물의 문제로 다툰다면 그것은 자기의 이김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각자에게 있는 지식의 다툼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복음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는 것이고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목표 없는 달음질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승리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지식을 거부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면 신앙과 성경을 도구로 해서 다투게 됩니다. 문제는 그러한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은혜를 말하면서도 그것으로 자신의 신앙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무지고 둔함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성을 알았기에 27절을 신앙고백처럼 말합니다.

 

 

달음질 하라고 말하는 바울에게 신앙은 항상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현실입니다. 세상에서 필요한 자기 일에 힘쓰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하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자는 예수 안에서 자기 것이 없는 자인데 실제로는 더 많은 자기 것을 쌓아서 이기고 자존심을 세우는 일에 몰두합니다. 이러한 현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싸움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이 싸움이 자기 몸을 쳐 복종하는 것이고 이들이 이미 상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달음질은 행위의 열심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싸움이 있는 신앙을 뜻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 싸움에는 필히 참여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복음을 전하고야 마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내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만이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다라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된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주를 위해서 한다고 했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 자신의 몸을 쳐 그리스도께 복종되는 것이고 이것이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그렇게 예수님이 하신 일만이 구원이 되고 영광이 된다는 고백을 하는 것으로 한 분 성령 안에서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여럿이 아닌 하나인 것이고 결국 상을 받는 한 사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이 다 달릴지라도 상을 받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는 것은 달음질을 잘한 사람 각자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기 실력과 힘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신앙적인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썩지 아니할 것을 얻는 목표를 향해 달음질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지식이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사용된다면 결국 목표 없이 달음질하는 것이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고 우상 제물을 거리낌이 없이 먹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 자에 대한 판단이나 자기 잘남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무지함의 소치일 뿐입니다.

 

 

신자가 복음을 위해 달음질 한다면 그 자체로 자유로운 자입니다. 매인 것이 없이 자유롭기에 달음질 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미 영광에 참여된 것이고 이것이 신자의 상입니다. 썩어지지 않을 영원한 것이 흔들리지 않는 목표가 되어 달음질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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