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12.04 13:55

(161강) 예수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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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36-4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6364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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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설교>

 

◉ 내 문제를 위한 기도 ◉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기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그 내용은 오로지‘자기 문제’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기도는 부르는 신의 이름만 다를 뿐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현대 기독교의 기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하나님을 유일신이고 참된 신이라고 자랑한다고 해도 지금의 기독교는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도 너희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신을 찾는 같은 종교일 뿐이다’라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관심이 자기 문제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 문제를 가지고 신을 찾아 기도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문제가 절대자의 뜻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져 있는 것이라면 자기 문제를 위해 기도하되 그 방향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자기 문제를 주관하고 계시는 절대자의 뜻을 염두에 둔 기도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기도입니다.

 

 

절대자, 즉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지 않는 다면 우리의 기도는 자기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시간과 열정과 간절함의 정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시급한 문제가 있을 때면 기도의 시간이나 열정이나 간절함의 정도가 강해지고, 지금 당장 시급한 문제가 없거나 자신이 힘으로도 능히 해결할 수가 있다고 생각되면 자연히 기도는 시들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께는 지금 시급하고 절박한 자기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한 문제가 여러분을 얼마든지 기도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없을 때 여러분을 기도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형식적인 기도로만 일관하고 있거나 아예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않은 채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의 내용은 기도에 대한 것을 생각하게 하며 깨어 있는 자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참된 기도의 자리로 인도하는 귀한 말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예수님의 슬픔과 고민 ◉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은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즉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으로써 하나님께 기도를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우리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37절에서 말한 대로 고민하고 슬퍼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38절에서는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시고 39절에서는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이 예수님의 기도를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민하고 슬퍼하셨다는 것이나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나약한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슬픔과 고민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야기하면서 예수 역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평가하기를 좋아합니다.

 

 

과연 예수님의 슬픔과 고민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사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시라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그 어떤 슬픔과 고민이 없이 당당하게 맞이하시는 것이 구세주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슬픔과 고민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슬픔과 고민을 담고 있는 예수님의 기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고민은 장차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계시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굳이 겟세마네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이유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죽어도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며 큰소리만 칠뿐입니다. 장차 그들이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들에게 펼쳐질 현실의 무거움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기도할 동안에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뒤로 하고 잠을 자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세계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게 하기 위해 제자들을 데려가셔서 예수님의 슬픔과 고민을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겟세마네에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슬픔과 고민을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그들이 장차 성령에 붙들리어 십자가의 길로 인도 받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슬픔과 고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십자가는 슬픔과 고민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슬픔과 고민에 전혀 동참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관심은 여전히 자기 문제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십자가가 예수님에게 슬픔과 고민이 되는 무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라면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길을 가는 신자 또한 예수님의 슬픔과 고민에 참여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같은 슬픔과 고민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전혀 무겁지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져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만 우리에게는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무거움을 알 수가 없고 십자가가 슬픔과 고민이 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치 겟세마네의 제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 아버지의 원대로 ◉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하십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앞서 말한 대로 십자가 고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장차 제자들이 누릴 기도의 세계를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도의 세계는 나의 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신 뜻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의 세계입니다.

 

 

누가 과연 예수님의 이 같은 기도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에는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은 세상의 죄로 인한 저주를 예수님께서 모두 담당하셔야 하는 저주의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원하신 뜻 앞에서 예수님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도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세계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는 전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기도는 오직 자기 뜻을 성취하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의 기도의 열정이 무엇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매년 수능 기간이 되면 교회는 기도회로 들끓는다고 합니다. 오로지 자기 문제, 자기 뜻의 성취가 관심의 전부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아버지의 뜻에 맡기면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뜻은 자신의 뜻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즉 나의 뜻을 이뤄주시는 것이 곧 아버지의 뜻이며, 내가 원하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 또한 아버지의 뜻이라고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자신이 뜻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뜻이 담겨 있지 않은 기도를 간절히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간절함은 오로지 자기 문제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자기 문제, 나이 뜻을 덮어 버린 기도를 간절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세상을 제대로 파악했을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저주 아래 있고 예수님은 그 모든 저주를 홀로 짊어지시는 길을 가십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저주를 해결할 길이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간절함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에 동참되기를 원하겠습니까? 당연히 세상을 저주가 덮인 곳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현장에서는 더 헛된 것임을 아는 신자가 간절함으로 예수님의 세계에 동참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 십자가의 세계는 아버지의 뜻으로만 가능하다 ◉

 

 

그런데 예수님의 세계가 가볍지가 않습니다. 슬픔과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는 무거운 세계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세계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절감하는 신자라면 바로 이것이 자신의 절박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육신이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는 이 같은 말이 사치일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고통을 당해 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쉽게 한다’고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편안한 환경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같은 말을 쉽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육신의 고통의 고통스러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린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세계를 우리 힘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 절박한 문제로 다가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문제로 인해서 얼마든지 주저앉을 수 있는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나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이 내게 이뤄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뜻으로는 예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능히 우리를 예수님의 세계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잠을 잤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세계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로 인해서 인생역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세계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자기 세계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는 세계가 어떠한가를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었기에 잠을 잔 것입니다.

 

 

신자의 깨어 있음을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되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만지는 것들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저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을 바르게 보게 될 때 예수님의 세계에 참여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알게 되고, 그 세계에 참여됨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신자에게서만 가능한 기도입니다.

 

 

45,46절을 보면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팔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치는 연약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현실이며 그러한 현실에서 설사 제자들이 원하는 삶이 이뤄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세상의 끝이 이르면 저주로 끝날 인생일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내게 이뤄지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슬퍼하시고 고민하셨던 십자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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