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12.11 13:03

(162강) 말씀의 성취

조회 수 512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마 26:47-5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6475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설교>

 

◉ 예수님을 안다면 ◉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교회 안은 물론이고 교회 밖에도 예수님을 안다는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물론 교회 안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구세주로 믿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은 예수를 알기는 하지만 믿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이들의 앎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앎의 결과는 어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지만 그들의 앎은 자기 인생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예수를 이용하려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앎과 기대가 무너지자 자기 살길을 찾아 예수에게서 도망을 칩니다. 제자들은 과연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참된 앎은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붙들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앎은 신뢰로 이어지고 신뢰는 어떤 형편에서도 의심과 흔들림이 없이 앎의 대상을 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이러한 믿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습니다. 먼저 내 자신의 삶의 모습들과 추구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정직히 들여다보고 과연 자신이 앎의 길과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예수님의 나라 또한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강한 힘을 가진 메시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가 세우실 주의 나라는 세상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로 세워질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헛된 기대는 실망과 배신으로 이어졌음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힘, 그리고 세상 ◉

 

 

본문에 보면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큰 무리들은 칼과 몽치로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큰 무리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일 이십 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수백 명의 무리가 예수를 잡겠다고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 한 사람 잡겠다고 그렇게 큰 무리를 동원한 것이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칼로 무장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설사 무장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큰 무리를 동원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를 잡기 위해 큰 무리를 동원한 것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월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경계하게 된 것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선동해서 군사들에게 대항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큰 무리를 파견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이 아무 대항 없이 순순히 붙잡히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추종하는데 그들을 선동해서라도 힘을 모아 대항할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칼과 몽치로 무장한 큰 무리를 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의 상식이며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세상을 힘으로 사는 것 밖에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힘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힘에는 힘으로 대항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생각에 갇혀서 예수를 바라보는 세상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벗어나서 다른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생각에 갇힌 채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자기 생각에 갇힌 상태의 삶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부흥 성장을 이뤄주는 예수님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세상의 복을 주어 힘을 가진 자가 되게 해주는 예수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가득한 자기 생각에 갇혀 있기에 힘이 복이 될 수 없는 나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생각에 갇힌 자의 앎은 참된 앎이 아닙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붙잡자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립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종의 귀를 벤 제자는 베드로고 대제사장의 종은 말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큰 무리들 앞에서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며 예수님에 대한 의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같은 행동은 칭찬을 받지 못하고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52-54절)는 책망만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을 근거해서 흔히 기독교를 비폭력주의, 무저항주의, 평화주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 무저항주의자고 비폭력주의자고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 말씀, 그리고 예수님 ◉

 

 

예수님은 자신을 붙잡은 사람들을 향해서도 이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55,56절)

 

 

예수님이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잡지 아니한 것은 예수님이 붙잡힐만한 일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강도를 잡는 것처럼 잡으려 하고 또 잡히시는 것은 다 선지자의 글, 즉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천사를 동원하여 자신이 살 길로 가시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길로 가고자 하시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길이기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에서 오직 예수님 한분만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순종의 길을 가셨습니다. 바로 이 분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가 왜 이 같은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오직 아버지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길로만 가신 예수님을 부르면서 나의 뜻을 이뤄달라고 하는 것이 믿음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예수님이 과연 우리의 뜻에 관심을 두고 우리의 뜻을 이뤄주는 분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처럼 자기 생각에 갇혀서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기 수준에 맞는 다른 예수를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자를 복주시고, 우리의 뜻을 이뤄주시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게 하시고 복을 주는 예수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 순종의 길을 가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의 나라인 세상에서 힘을 가진 자로 존재하기를 원하고 그것을 예수님께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는 목적은 오직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 믿는다는 것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 말씀, 그리고 신자 ◉

 

 

유다는 군사들과 미리 군호를 짭니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신호를 정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께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춥니다.

 

 

그런데 미리 그렇게 신호를 정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수께 다가가서 ‘이 사람이 바로 예수요’라고 가리키면 될 일을 왜 번거롭게 신호를 정하고 예수께[ 입을 맞추면서 인사를 하는 것일까요? 그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이미 떠났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 행동을 하면서 말입니다.

 

 

유다가 신호를 정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은 유다의 행동을 알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를 팔아넘기는 배신의 악한 행위를 하면서도 자신의 행위를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고 싶어 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끝까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유다가 ‘이 사람이 예수요’라고 했다면 스승을 배신한 자가 자신임을 만 천하에 드러내는 결과가 됩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를 추종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될 것입니다. 유다는 아마 그것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배신하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는 지키고자 하는 의도로 신호를 정하여 행동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배신을 감추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고 자기 존재가치를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것 말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은 오로지 나의 일이 이뤄지는 것으로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나의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세상 살 맛도 잃어버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말씀이 이뤄지는 것보다는 나의 일이 더 크고 중요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구원이 이뤄진다면 그 구원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나의 일이 이뤄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것을 더 크고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일이 이뤄지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것에 마음이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길을 가신 예수님의 순종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부활의 생명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순종에 우리의 전부를 맡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힘으로 누리는 쾌감과 즐거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힘이 주는 승리감도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부활의 생명에는 결코 참여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예수님의 순종으로 성취된 것이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힘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도덕심을 발휘하여 존재 가치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 이뤄지는 것에 자신의 모든 뜻을 두고 순종하신 예수님께 내 인생 전부, 내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성취되어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참된 앎이고 믿음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19792
2012.04.22 111 누가복음 (7강) 목자와 영광 신윤식 5801
2012.04.15 110 누가복음 (6강) 예수님의 탄생 신윤식 6104
2012.04.01 109 누가복음 (5강) 요한의 출생 신윤식 5143
2012.03.25 108 누가복음 (4강) 두 여인의 찬양 1 신윤식 5429
2012.03.18 107 누가복음 (3강) 말씀과 마리아 신윤식 5142
2012.03.11 106 누가복음 (2강) 벙어리가 된 사가랴 신윤식 6806
2012.03.04 105 누가복음 (1강) 말씀의 목격자 4 신윤식 6066
2012.02.26 104 마태복음 (172강) 제자로 삼아 신윤식 5664
2012.02.19 103 마태복음 (171강) 부활하신 예수 신윤식 6309
2012.02.12 102 마태복음 (170강) 죽으심과 인간 신윤식 5420
2012.02.05 101 마태복음 (169강) 저주와 구원 신윤식 5334
2012.01.29 100 마태복음 (168강) 십자가의 현실 신윤식 5343
2012.01.22 99 마태복음 (167강) 군병들의 조롱 신윤식 5197
2012.01.15 98 마태복음 (166강) 나를 이끄는 것은 신윤식 5216
2012.01.08 97 마태복음 (165강) 피의 가치 신윤식 5325
2012.01.01 96 마태복음 (164강) 베드로의 부인 신윤식 5265
2011.12.18 95 마태복음 (163강) 신성 모독 신윤식 5229
2011.12.11 » 마태복음 (162강) 말씀의 성취 신윤식 5129
2011.12.04 93 마태복음 (161강) 예수님의 기도 신윤식 5287
2011.11.27 92 마태복음 (160강) 베드로의 장담 신윤식 5228
Board Pagination Prev 1 ...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