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12.18 13:13

(163강) 신성 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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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57-68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6576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설교>

 

◉ 심문을 받으심 ◉

 

 

세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과학적 증명으로 입증된 사실만을 믿으려고 하는 현대인의 사고에 비춰보면 예수라는 존재는 역사의 한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한 예수를 하나님으로 또한 구세주로 믿어야 천국 간다는 것은 현대인들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논리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는 그 어떤 표적도 증거물도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을 신뢰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는 성경도 믿음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현재도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원 사역을 행하고 계심을 세상이 납득할 수 있도록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기적적인 현상도 보이지 않습니다. 때문에 세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붙잡아 심문하는 당시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갑니다. 그곳에는 서기관과 장로들도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거짓증거를 찾습니다. 사형에 해당되는 죄목을 붙이기 위한 빌미를 찾는 것입니다.

 

 

거짓증인들이 많이 왔지만 이용할만한 증거를 얻지 못했는데,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이 거짓증거를 빌미로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심문의 내용에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답하십니다. 대제사장은 그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분개하며 신성모독으로 몰아붙입니다.

 

 

이러한 심문의 과정을 보면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를 묻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가 될 수 없음을 확증한 채 예수님의 답을 통해서 죽일 증거를 찾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답답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만한 확실한 증거를 내어 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하늘의 천군천사만 대동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잠잠히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뒤집어쓰시고 죽으시는 길을 가신 것입니다.

 

 

◉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구약성경에 능통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2절에 보면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이 같은 말씀만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인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아무런 의심 없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못하고 증명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말 그대로 허깨비를 좇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표적을 봤거나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과학적 증거와 입증을 통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 되심을 예수님에게서 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신성 모독이라는 죄목으로 죽이려고 하는 그들도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았다면 예수님에게서 그리스도 되심을 발견할 수는 있지 않았을까요?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은 그들이 잘못된 메시야 관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군 천사를 대동하셨다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비롯한 온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메시야로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던 근본적인 메시야 관은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메시아의 일을 예수님에게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제자들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신성 모독으로 몰아붙이는 그들이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아닌 것에 실망하고 도망치는 제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모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 신성 모독 ◉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말씀에 옷을 찢으며 신성 모독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 같은 천한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나선 것에 있습니다. 예수와 같은 천한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예수와 같은 수준의 별 볼일 없는 신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기존의 하나님 관으로는 설사 예수님을 아들로 인정한다고 해도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을 얻고자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신성모독이겠습니까? 하나님 되심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얄팍한 인간의 욕망을 성취시켜주는 신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의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신성 모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위해서 참되 메시야를 제거할 증거를 만들어 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 앞에 있는 예수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로지 그들이 붙들어 온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가 없으며 되어서도 안된다는 일념으로 예수를 제거하는 것만이 그들의 목적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경이 펼쳐지고 예수가 전해진다는 기독교의 현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성경은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거짓 증거를 만들어 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자신의 말을 예수님의 말씀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한 거짓 증거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가령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는 말씀을 이용하며 하나님을 사람으로 가득한 교회의 부흥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이 성경을 거짓증거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고 이것이 신성 모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교회에 사람이 가득해지는 것으로 기뻐하시는 분으로 전락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신자에게 말씀은 ◉

 

 

거짓 증인 두 사람이 말은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가 있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성전을 헐고 짓는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성전을 헐면 예수님이 다시 세우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에만 집착하고 있었을 뿐 성전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의 제사 의식은 있을지언정 자신이 죄인 됨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물을 바치면서도 죄와 회개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성전을 허무는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성전을 허물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를 용서하시는 참된 성전으로 세워지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거짓 증거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말을 바꾸게 되고 말씀하신 참된 의미 또한 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들 거짓 증인들과 같은 마음으로 성경을 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지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말씀을 보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원하는 뜻을 이루기 위한 이용 도구로만 여기는 현상이 만연한 것이 현실이고, 그것이 곧 말씀을 모독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말씀을 펼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함이지 나의 생각과 말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한 증거로 이용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즉 성경은 나를 위한 그 어떤 도구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읽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복을 받겠다는 의도로 성경을 본다면 결국 자기 목적을 위해 성경을 펼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모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66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말을 신성 모독으로 정죄하고 공회원들에게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답하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립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68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들은 선지자를 모든 것을 알아맞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때리는 와중에 누가 때렸는지를 알아맞히는 예지의 능력이 있는 것이 선지자라는 것이 그들 생각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철저하게 말씀 밖에 있었습니다. 선지자조차 하나님이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세움 받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지의 능력이 있으면 선지자로 인정해 주겠다는 말에서 그들의 사고방식이 어떠했는가를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들을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은 말씀에 관심이 없는 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은 말씀에 관심이 없는 자칭 신자라 일컫는 사람들에 의해 배척받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나의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이 나 같은 자에게 베푸신 구원의 일을 깨달음으로 감사로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는 말과 삶은 이러한 신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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